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샘달 엿새 Dec 19. 2021

눈 내린 아침과 밤에는

커피, 와인 그리고



눈을 떠보니 열 시. 기숙사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은 어제 같은 시간보다 빛나는 느낌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2층 침대에서 내려왔다. 룸메이트들은 일찍부터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아침, 홀로 남은 방에서 혼자를 즐겼다.



오늘은 언제 나갈까.

뭘 먹을까.

룸메(이트)들은 언제 들어오나.



문득 창밖을 내다봤다. 간밤에 많은 눈이 내렸다. 그제야 나는 오늘 아침이 더 밝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기숙사가 산 중턱에 있기에 눈이 꽤 많이 쌓였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문득 귀찮음이 몰려왔다. 미끄럽고 발이 시릴 것 같아서 오늘은 기숙사에 콕 박혀 있고 싶었다. 그러면 또 공부는 안 할 것이고 별 쓸데없는 가십거리나 보면서 시간을 낭비할 게 뻔한데. 이걸 어찌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방안을 서성이는데 방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룸메다. 눈이 묻은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오면서 이제 일어났냐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을 맞이한 설렘과 기쁨이 묻어 있었다.



“아침부터 어딜 그렇게 갔다 왔어? 눈이 엄청 많이 내린 것 같은데?”

“이런 날에는 커피 마셔야지! 눈이 너무 예쁘잖아!”


두꺼운 패딩을 벗으며 룸메는 오전의 행적을 알렸다.


“딱 봐도 발이 빠질 정도로 내렸는데 카페까지 다녀온 거야?”

“그럼, 그래야 더 맛있지.”



허허허허. 그녀는 귀차니즘에 절여진 나와는 달리 아침부터 활기가 넘쳤다.



눈과 커피라.

뭔가 멋진 조합이긴 하다. 그런데 평범한 날, 평범한 걸음으로 산 길을 10분 정도 걸어 나가면 보이는 학생회관 건물에서. 이런 날 썰매를 타도 될 것 같은 비탈길을 5분 정도 더 내려가야 도착하는 법대 건물에 위치한 커피 가게에 다녀왔다는 건데. 이런 수고로움을 견디고 얻은 커피 한 모금은 어떤 맛일까. 내가 바라볼 눈보다 더 빨리 만났기에 더 순수한 눈을 구경하면서 룸메는 누구와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기숙사콕을 하기엔 눈이  사라질  같았다. 가방을 챙겨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미 정오를 지나 눈이 조금씩 사라지는 중이었다. 도로에 나오니 이미 눈이 치워졌다. 혹시 모를 빙판을 조심하면서 도서관에 도착했다. 그날도 나는 토익이나 자잘한 자격증 시험을 공부하느라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방학중 중앙도서관은 일찍 문을 닫았다. 어느새 어두컴컴해진 저녁, 일과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는 나뿐인 느낌이었다.



왠지 눈을 밟고 싶었다. 종종 사람 발길이 덜 닿은 눈밭이 나타났다. 발바닥에 조심스레 힘을 주니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샌드위치 빵 같은 폭신한 표면이 순식간에 와플 기계에 찍어낸 것처럼 납작해졌다. 뽀드득 소리도 덤으로 얻었다. 자연에 내 공산품 신발 바닥 모양을 양산하고 있는 와중에 눈이 쌓인 나무를 발견했다. 자세히 가보니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촘촘하게 앉은 눈이 눈에 띄었다.



멀리서 보니 그냥 하얀 눈 나무였는데, 가까이 보니 회색 나뭇가지에 하얗고 가는 눈이 찰싹 달라붙었다. 이런 눈 나무의 사연은 나에게 멀리서 보아서는 그 사연을 절대 알 수 없음을 알려줬다. 그리고 뭐든 자세히 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사실도 몇 해가 지나서야 깨닫게 했다.



하지만, 눈의 아름다움, 즐거움은 잠깐이었다. 삶도 마찬가지 같았다. 행복을 추구하지만 매일, 매 순간이 그렇지 않은 것처럼, 아직은 철부지 대학생이라 할지라도 삶이 녹록지 않음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다.



대학을 갓 들어갔을 때와는 달리, 학기를 거듭하면서 진로, 인간관계, 가족 등을 동반한 삶의 고민이 쌓여갔다. 친구들은 하나, 둘씩 본인의 길을 위해 떠났다. 단짝이 휴학을 하면 난 누구와 수업을 들을지, 점심은 어디서 누구랑 먹을지 현실적 고민이 찾아왔다. 선배, 동기가 취업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무얼 하고 살았는지 자괴감이 들면서 나는 무슨 일을 할지 먹먹한 한숨이 가득 차서 그날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설경을 바라보며 눈의 아름다움은 곧 눈 녹은 현실이 되고, 순수한 기쁨은 ‘당장 나는 무얼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수반한 한숨으로 변했다.



그 사이 기숙사에 도착했다. 젖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또 다른 룸메가 먼저 와있었다.



“도서관 갔다 왔어?”

“응. 눈 많이 내렸더라. 빙판길 조심해야겠어.”

“그렇지. 그런데 밤이 되니까 더 멋지지 않아? 이런 날 와인 먹어줘야 돼.”

“와인?? 와인이 어딨어?”

“내가 이런 날 마시려고 항상 갖고 다니는 게 있어.”



나의 또 다른 룸메는 책상 밑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짙은 초록색 와인병에 반쯤 담긴 진짜 포도주였다. 그녀는 능숙하게 미니 와인잔도 준비했다. 찌그러진 코르크 마개를 ‘퐁’하고 뽑더니 두 잔에 와인을 조금씩 따랐다. 쪼르륵 소리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자. 마셔봐. 눈 내린 밤에 마셔야 좋아.”



룸메 말대로 잔을 들었다. 한 입 거리도 되지 않은 와인은 내가 알던 와인 맛과 똑같았다. 다만, 그 한 모금은 눈 내린 밤과 그날의 분위기를 계속해서 꺼내먹을 수 있는 이야기로 남았다.






어제 오후, 서울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대설 주의보답게 짧은 시간에 많은 눈이 쌓였다. 눈이 그친 저녁. 나는 외출할 구실을 만들었다. 머리를 요리조리 굴린 끝에 나는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로또랑 떡볶이 사올게!”


재빨리 채비하고 눈 내린 마을로 향했다. 뽀득한 눈을 밟고 눈 쌓인 나무를 사진에 담아 보았다. 교회 앞 넓은 마당에는 눈에 빠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그리고 아이를 태운 썰매를 짊어져, 어깨가 곧 무너질 것 같은 여러 어른들도 구경했다. 그들을 보자니 웃음이 절로 났다. 빙판을 살금살금 지나고 아스팔트 위 염화칼슘도 몇 번 밟자 목적지에 도착했다.



로또 -파이어족의 밑천이 될지도 모를- 한 장에 희망을 품어 보고, 떡볶이-내 영혼의 음식-와 순대를 포장하며 이런 날 왠지 어울릴 것 같은, 유부주머니도 같이 주문했다. 두둑한 포장을 한 손에 들고 눈길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과 마음이 겹쳤다. 난 여전히 내 삶에 고민이 많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어젯밤 풍경은 대학시절의 그때와 펑펑 내린 눈 빼고는 모든 게 달랐다. 다만, 그때보다 나아진 걸 꼽자면 눈 내린 날을 즐기는 마음은 눈 내린 마을처럼 커졌다는 점이다. 그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2014년 남산에서 만든 눈사람과 어젯밤 눈꽃


매거진의 이전글 런던의 오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