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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O May 25. 2022

손가락 열상

여덟 번째 편지_주황색 옷을 입은지 10년이 되었던 어느 날


들어가며

지난 10년간 소방관 자살자의 수는 순직자의 2배에 이릅니다. 소방관의 자살이 되풀이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생사를 오가는 화재, 구조, 구급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몸과 마음의 트라우마, 신고자나 민원인의 민원 제기, 그리고 상사나 동료와의 갈등이 그 이유입니다. 며칠 전 국제 소방관의 날에 경기도 과천소방서에서는 새내기 소방관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지요. 한 달 전쯤 우리 부산소방본부에서는 한 직원이 극단적 선택으로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연유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소방관이라는 직업에서 기인하는 어려움이 그 선택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부의금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점차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23년의 소방 경험을 담은 이야기가, 앞으로 있을지 모를 그들의 선택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야기를 써 내려가 봅니다.




2010년 초봄이었습니다.

연도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까닭은 그 해가 제가 소방서에 들어온 지 정확히 10년 차가 되는 해였기 때문입니다. 소방서 10년 차, 어느 정도 현장 경험도 쌓이고 계급도 꽤 높아지는 시기. 목에 힘을 주고 싶기도 하고, 제법 늘어난 후임들의 눈 탓에 현장에 가게 되면 주변 후임들을 의식하게 되는 때입니다. 그때의 제가 딱 그랬던 것 같아요. 강서소방서에 발령받아 1~2년 정도 내근업무를 하다가 다시 119안전센터로 내려와서 화재진압대원으로 활동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부산강서소방서 전경


지금은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인 부산의 명지 국제 신도시는 그때까지만 해도 드넓은 대파밭이었습니다.
낙동강 하구에서 대를 이어 살던 사람들이 대파 농사와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곳이었지요.     
 

“화재 출동! 화재 출동! 명지동 농막 화재!”     


농막은 농사를 짓는 데 쓰는 괭이나 호미 등 농기구를 보관하거나 농산물을 보관하는 일종의 창고 막사를 말합니다. 본격적인 농사철이 다가오니 그런 농막에도 불이 난 모양이었죠. 하지만 보통 농막은 농경지 부근에 있는 데다 거주 목적도 아니기 때문에 인명피해나 재산 피해도 미미한 편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소방차에 올랐습니다. 요즘은 농막도 보통 한 동짜리 컨테이너로 되어있어 그 정도는 가볍게 끄고 오면 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농막화재 _ 출처: 이강안 블로그


현장에 도착해 보니 예상한 대로 한 동짜리 컨테이너가 통째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주위엔 사람이나 다른 건물도 없었기 때문에 여유 있게 소방차의 호스를 연결해서 물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를 몇 분 후, 불길이 잦아들고 흰 연기만 모락모락 피어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방수 중지! 이거 저기로 옮기고, 이쪽에 방수 좀 해봐!”     


불이 웬만큼 꺼지자 팀장님은 바깥에서 물을 뿌리는 것을 중지하라고 말했습니다. 안에 쌓여있던 물건들을 치우고 불씨가 남아있는 농막 안쪽으로 물을 뿌리라고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일단 호스를 잠근 뒤 농막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여전히 열기는 남아있었지만, 불은 거의 꺼져서 시야는 어느 정도 확보되었습니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컨테이너 공사를 하고 남은 샌드위치 판넬이 많이 쌓여있었습니다. 그 판넬 때문에 안쪽에 남은 불씨엔 물이 도달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안에 들어가 그 판넬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불에 탄 샌드위치 판넬은 뜨거웠지만 그걸 옮기지 않고서는 완벽히 화재 진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씩 그걸 들어서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습니다.
 
하나씩 들어서 나왔으면 됐을 텐데 저는 후임들 보란 듯 몇 개를 한꺼번에 바깥으로 들고나왔습니다. 그걸 바깥으로 꺼낸 뒤 땅에 놓는 순간, 손가락에 무언가 짜릿한 것이 스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장갑을 벗고 보니 왼손 약지 첫 마디 부분이 베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샌드위치 패널을 감싼 철판에 손가락이 베인 것이었습니다.      

현재 보급되는 방화장갑


지금이야 소방관의 장갑이 방수 기능은 물론 내열 기능까지 갖춘 특수 원단으로 생산되고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장갑은 일종의 고무장갑에 바깥에는 적당히 두꺼운 코팅을 해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걸 끼고 날카로운 샌드위치 패널을 들다 보니 그 철판에 손가락을 베인 거였지요. 저는 지혈을 한 뒤 반창고라도 하나 붙이면 되겠거니, 하고 구급차에 가서 구급대원에게 응급처치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급대원은 출혈이 멈추지 않는다고 하며 병원에 가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팀장님께 보고한 뒤 구급차를 타고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의사는 정밀검사 결과 왼손 약지의 신경과 힘줄, 인대가 손상되었다며 봉합수술을 하고 재활치료까지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방 활동에 장애가 되는 샌드위치 패널을 한 번 옮긴 결과치곤 너무나도 참혹했습니다. 그날 바로 입원하여 봉합수술을 했습니다. 신경과 힘줄을 잇는, 절대 간단하지 않은 수술이라고 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와 아이들이 찾아왔습니다. 둘째는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는 저를 보더니 한달음에 뛰어와 안겨 눈물을 흘렸습니다. 붕대로 칭칭 감긴 제 손을 보고 한 번 더 울더군요. 아내도 마음이 편치 않은지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제 손을 잡으며 그래도 이만하니 다행이라며, 힘을 내라고 했습니다.
첫째도 제 손을 잡고 울먹였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제 눈에서도 눈물이 났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의 응원을 받으니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었습니다.
저는 봉합수술을 받은 뒤 재활치료에 열심히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2년이 흘렀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왼손 약지 첫 번째 마디가 약간 벌벌 떨립니다. 

여전히 움직임에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집니다. 어떤 날은 꼭 제 손가락이 아닌 것같이 의뭉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저릿하기까지 합니다. 그때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전문 병원에 가서 봉합수술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10년도 더 흐른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나마 완전히 잘리거나 신경이 끊기지 않고 그렇게 베이기만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봉합수술을 받고 몇 달에 걸친 파라핀 치료와 물리치료를 거쳐,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은 왼손 약지 한 마디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상을 당한 뒤 공상 처리, 그러니까 공무 중 다친 재해 사고에 대한 처리를 하고 십 년이 더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 사고로 인해 치료비 외에 다른 어떤 혜택을 받아본 적은 없습니다. 소방서에서 손가락 한 마디 베이는 부상은 어디 가서 말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어디가 부러지거나, 심한 화상을 입거나, 혹은 장애등급 정도는 받아야지 공상이니 부상이니 말이나 꺼낼 수 있을 터입니다. 소방 활동 중 사망하는 사람이나 장애 판정을 받는 사람도 있는데 그깟 손가락 한 마디 베었다고 엄살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소방관들에게 그 정도 부상은 그저 일상다반사입니다.      




하지만 그 부상은 제 손가락은 물론 마음에도 작지만 큰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아직도 화재 현장에 가서 불에 타고 남은 무언가를 맨손으로 옮길 때 조심스러워집니다.
될 수 있으면 갈쿠리나 다른 도구를 쓰지, 손으로 뭔가를 옮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트라우마라면 트라우마가 될 수 있겠지요.

다른 소방관들도 아마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면서 마음속에 몇 가지 트라우마를 품게 되었을 것입니다.
가족들의 응원이나 동료들의 위로로 보통 치유가 되긴 하지만, 몇몇은 마음속 깊이 트라우마로 남습니다.

마음속의 침전물처럼 가라앉은 트라우마를 진정으로 치유하려면 서로 간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믿을 수 있는 동료들, 가족들과 함께 겪었던 일들을 서로 나눔으로써 본인 자신도 치유 받을 수 있고, 상대방 또한 본인을 이해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아, 그래서 저 사람이 그랬구나!’     


그렇게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면, 그의 행동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해는 곧 배려가 되고, 그 사람의 트라우마는 치유 받습니다. 그런 대화와 나눔의 선순환을 위해 저도 제 경험과 트라우마를 여기에 풀어놓습니다. 그리하여 동료들이 자신과 가족을 사랑하며 소방관이라는 명예 안에서 국민을 구할 수 있도록 아무 걱정없이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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