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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O Jun 08. 2022

사다리와 할머니

아홉 번째 편지_우리의 일이 바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소방관으로 일하기 시작한 후에 가장 먼저 했던 건 바로 소화기를 구입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산 빨간 소화기를 부모님은 물론 여자친구, 누나, 그리고 친구에게 선물했습니다.

지금 그 소화기는 언제 생길지 모를 불행을 대비해 각자의 차 트렁크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소방관이 된 이후 저는 세상에 흩어진 많은 불행을 목격합니다.
누군가는 공사장 콘크리트 바닥에 추락해 팔이 부서지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찌그러진 트럭 운전석에서 비틀비틀 걸어 나오기도 합니다.

 검붉은 혈흔이 콘크리트 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모습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고가 일어나는지 몰랐습니다. 소방시설 오작동부터 화재나 인명사고까지, 크고 작은 순간들을 목격하니 세상에는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사고는 말 그대로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소화기를 사서 건네는 제 마음 어딘가에는 ‘세상에 일어나지 못할 불행은 없다’라는 생각이 있었을 겁니다.
물론 피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언제까지나 가만히 앉아서 불행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언제든 사고가 벌어질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때부터 저는 길을 걷다가도 습관처럼 소화전을 보게 됩니다. 가끔 선임들이 길을 걸을 때 소화전을 주시한다고 하는 말이 그저 우스갯소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는 저도 소화전에 눈길이 갑니다. 이전에 영화관을 갈 때면 영화가 시작하기 전 팝콘을 와그작와그작 씹어먹으며 스크린을 봤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 비상대피로 설명 영상을 유심히 봅니다. 운전하다가 터널이라도 진입하게 되면 터널 안에 있는 소방시설은 무엇이 있는지 한번 훑어보게 됩니다. 불행이 무섭고, 사고가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 주위에는 아무 일 없이 무탈하기를 늘 기도하고 소망합니다.  
    


그럼에도 늘 사고는 벌어집니다.

저번 주, 오전 출근하여 서무 업무를 마무리하던 중이었습니다.

“구조 출동, 구조 출동, 어... 웅동 펌프, 구조 출동입니다. xx동 xx아파트 302호이고, 현재 문이 안 열린다고 합니다. 현재 내부에는 할머니 한 분 계신 상황.”     


출처: 인천일보 갈무리


상황실 전파 내용을 확인하고 출동 지령서를 보니, 센터 근처에 있는 아파트였습니다.
노모 한 분이 집에 계신 상태였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아 문 개방을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최대한 현관문 개방을 자제하고 창문으로 진입해달라는 신고자의 부탁이 덧붙여있었습니다.

 보통 주방에 가스 불을 켜 두고 나왔는데 문이 닫혀 있는 상황처럼 긴급한 상황에서는 현관문을 강제로 개방하지만, 현관문 강제 개방이 아닌 걸로 보아 다행히 위급 상황은 아닌 걸로 보였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뒤 팀장님과 함께 펌프차에서 내렸습니다.
문득 요즘 아파트들이 다 똑같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모난 아파트의 모양은 똑같고, 앞에 적힌 동을 나타내는 숫자만 다릅니다.
비슷하게 생긴 건물 사이를 헤집으며, 구조 대상자가 거주 중인 동호수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 아파트는 101동 뒤로 응당 나와야 할 102동이 아니라 갑자기 105동이 나오는가 하면,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가 불쑥 연결되기도 합니다.


팀장님은 펌프차에서 내리자마자 아파트 동을 확인하러 갔고, 저는 혹시 뒤쪽 베란다에 구조 대상자가 있진 않을까 싶어 아파트 뒤편을 둘러봤습니다. 그때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와 자신을 신고자라고 설명했고, 어머니가 위에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302호가 어딘지 물으니 손가락으로 세 번째 층을 가리켰습니다. 사다리로도 충분히 접근이 가능한 듯 보였습니다.     
 

“하늘아, 사다리 펴자.”     


본문과 관계없는 사진 / 출처: 연합뉴스 갈무리


팀장님은 사다리를 통해 베란다로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주임님이 반대편에서 사다리를 지지했고, 저는 사다리를 폈습니다. 사다리를 끝까지 펴니 302호 베란다에 딱 맞게 닿았습니다. 눕힌 사다리를 창문틀에 고정하고 사다리의 고정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베란다가 곡선형으로 되어 있어서 지지 상태를 잘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올라가려고 하니 주임님이 제게 물었습니다.   
   

“하늘아, 내가 올라갈까? 너보다 가벼우니 사다리가 덜 흔들릴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저는 조심스레 올라갔습니다.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시야가 상승했습니다. 처음에는 아파트 가로수가 보였다가, 곧 콘크리트 아파트 외벽이 보였고, 베란다 쇠창살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금방 전 아래에선 까마득하게 올려다봤던 베란다 창문이 서서히 가까워졌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겨드랑이를 파고들었습니다. 사다리 끝에 서서 조심스레 창문틀을 잡으며 창문에 바짝 붙었습니다.

베란다 창문틀을 한 손으로 잡고 스르륵, 열었습니다.

그리곤 한 발씩 조심스레 발을 넘겨 쇠창살을 넘어갔습니다. 베란다 블라인드를 제치고 안으로 들어가니 노인
한 분이 저를 쳐다보고 계셨습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119에서 나왔습니다. 문이 잠겨 있다고 해서 열어드리려 왔습니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그런데 할머니는 제 질문에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바로 밑엔 후착대로 도착한 구급대가 할머니의 상태를 확인하러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얼른 문을 열어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할머니, 죄송하지만 잠깐만 들어가겠습니다.”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저를 계속해서 바라보던 할머니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식탁 의자에 앉았습니다. 저는 투명 인간이라도 된 양 서늘하고 찝찝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할머니께 잠시 고개를 꾸벅 숙이곤 현관을 찾아 문을 열었습니다. 경쾌한 멜로디가 울리더니 손쉽게 문이 열렸습니다. 할머니는 왜 문을 열지 않았을까, 저는 구급대에 현장을 인계한 뒤 아파트를 나왔습니다.      

귀소하는 길 위에서 제 눈앞에는 그 어르신의 모습이 아른거렸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어디가 편찮으셔서 문도 열지 못하셨던 걸까요?
분명 거동도 가능하며 몸에 힘도 충분히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창문 너머 들어 오는 제 모습을 보고도 아무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볼 정도라면, 어떤 상황 판단을 하는 게 어려워 보였습니다.

할머니와 처음 마주쳤을 때 나눈 대화도 다분히 일방적인 의사소통이었습니다.
저를 투명 인간처럼 쳐다보던, 그 공허한 눈동자가 쉽사리 잊히지 않습니다.



스핑크스가 냈던 수수께끼는 틀렸습니다.


사람은 아침엔 네 발, 점심엔 두 발, 저녁엔 세 발이 되는 동물이 아닙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다시 네 발로 돌아갑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치매 노인 인구는 자그마치 8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노인 인구 10명 중 한 명은 치매를 앓고 있고, 12분에 한 명씩 치매 환자가 발생합니다.
우리나라 전체 노인 중 20% 이상이 치매의 전 단계 격인 경도인지장애를 갖고 있고, 이 중 80%는 뚜렷한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는 경우 높은 확률로 치매로 발전합니다.      

출처: 국제뉴스 갈무리


다음번 본가에 방문할 땐 ‘치매엔 이게 좋더라’하고 얘기를 꺼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부모님은 제가 소화기를 처음 선물할 때처럼 의아한 표정을 띠실 것 같습니다.
얘가 갑자기 무슨 치매 얘기를 꺼낸다면서 너스레를 떠시겠지요.

나이가 든 탓인지, 소방관이 되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부쩍 부모님을 향한 잔소리가 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저는 습관처럼 부디 세상이 평온하길 기도합니다.
사다리와 할머니, 이 어색한 관계의 두 단어가 다시 맞닿는 일은 영영 없었으면 바랍니다.


본 칼럼은 원저작자의 동의를 받고 편집되었습니다, 공유는 브런치 '공유하기' 기능을 이용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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