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취업 준비로 영어 회화를 공부하기 위해 영어학원에 갔다. 그곳에서 리차드라는 영어 이름을 가진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당시 이미 외국인 회사에 다니고 있는 직장인이었다. 노총각 아저씨 같은 사람이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순수하고 믿음직해 보였다.
10월의 어느 가을날 마당놀이 티켓이 어디서 생겼다며 함께 가자고 하였다. 그렇게 마당놀이를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좋아하는 가수 정태춘 박은옥 콘서트 티켓이 생겼다더니, 그다음엔 뮤지컬 그다음엔 연극 등을 끊임없이 준비했다.
나를 위해 정성 들여 공연을 예매했던 그가 듬직하고 좋았다. 20대 연애가 하고 싶었던 외로웠던 가을 그와 함께 내 청춘 최고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가난한 집 어린 동생들이 있는 장녀였고 자신감도 없었고 직장도 없었다. 내세울 것 하나도 없었는데 그는 우리 부모님을 만나서 나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아저씨 같은 든든한 그가 너무 좋았다. 영화 제목처럼 너는 내 운명이었다. 그렇게 나는 첫사랑을 만나 친구 중에 제일 처음으로 결혼했다.
그렇게 운명처럼 만나 조건 등을 서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결혼했지만 남편과 평소에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다. 한 번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남편이었다.
시어머니에 대해 섭섭한 것들 이야기하면 “참! 사람 한심하다, 그렇게 삐딱하게 밖에 생각 못 하냐? 같이 모시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더한 사람들 보고 감사하며 살아라.” 한다. 섭섭해서 눈물이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난 그냥 내 편 되어주고 들어주면 되는데 말이다. 난 대화가 되지 않고 나에게 순종과 복종을 강요하는 남편이 미웠다.
또 내가 누굴 미워하거나 누구 험담을 조금이라도 하면 “참 한심하다, 그러면서 교회는 왜 가나? 그러려면 가지 마!!” 또 이런다. 내가 무슨 말만 하면 한심하다 한다. 날 무시하는 게 도가 지나쳤다.
남편은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다. 일 년 365일 한결같고 감정의 변화가 전혀 없다 무슨 기계도 아니고, 참 답답했다. 나에게 평소에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늘 아이 다루듯이 교훈이 담긴 말만 했다.
“착하게 살지 마라, 세상이 그리 만만한지 아냐? 당신은 딱 사기 치기 좋은 스타일이다. 나 안 만났으면 사기꾼이나 놈팽이 만나 지지리 고생하고 있을 테니 평생 은인으로 생각하고 나한테 잘해라”
그의 대화 기법은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2008년,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는 너무 완벽했다. 창밖엔 눈이 내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새집으로 이사한 거실엔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이제는 어느 정도 자라서 믿음직한 아들과 예쁜 딸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성실한 남편이 있었다.
“아, 행복하다. 이렇게만 살고 싶다.” 나는 행복에 겨워 혼자 되뇌었다. 그러나 이 행복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남편은 평소 감기 몸살 한번 앓지 않았을 만큼 건강했다. 그런데 건강검진에서 갑자기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 이것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큰 불행을 몰고 올 것인지 그때는 몰랐다. 아직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을 입원시키고 집으로 돌아와 편지를 썼다.
“아이들 때문에 우리는 아플 수도 죽을 수도 없다는 것 알죠? 지금까지 당신과 나 삐걱거리던 적도 많았는데 앞으로 남은 시간은 진심으로 아껴주며 서로 사랑하며 늙어가고 싶어요. 당신도 나에게 빚진 거 꼭 갚아요! 사랑해요~~”
남편은 나에게 당부의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 “나 없으면 어찌 살래? 바보처럼 속지 말고 살아라. 착한 게 좋은 게 아니다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아라”였다.
내 동생들에게 언니와 아이들 옆에서 잘 돌보아 달라며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살려보려고 기도하며 눈물로 병간호하는 나에게는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았다. 끝까지 대화가 안 되었고 나를 섭섭하게 했다. 남편 장례 후 유품들을 정리하며 책장에서 쪽지 하나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선욱에게.. 당신의 27번째 생일을 이 세상 가장 좋은 말들을 모아서 진심으로 축하하며, 못난 나에게 시집와 고생 많이 하는 것에 대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렇지만 이것 하나 약속할게. 이 평생 다하도록 나의 사랑 백선욱에 대한 아낌과 사랑이 정말 변함이 없을 거라고! 그리고 마음고생이 있는 것 아는데 조금만 더 참아주고 사랑으로 감싸줘.. 그럼 이만.. 당신의 영원한 나뭇꾼 김양욱”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10년도 훨씬 넘은 기억도 나지 않는 구겨진 쪽지 하나에 담긴 그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얼마나 오열했는지 모른다. 나의 섭섭함에 대한 그의 마지막 선물인 것 같았다.
“미안해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우린 항상 서로에게 이 세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표현하는 데는 서툴렀다. 하지만 그 마음과 눈빛은 항상 이 세 가지 말을 담고 있었는데 우리의 감각은 너무 무뎌서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내 인생의 선배였고 한 집안의 가장이자 아이들의 아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인생을 따뜻하게 빛나게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그렇게 많이 눈물로 기도했는데 나에겐 기적도 없었다. 이건 분명한 배신이었다. 끝까지 내 옆에서 날 지켜주는 나뭇꾼이라더니 어찌 나뭇꾼이 먼저 하늘나라로 간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