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무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익명의 오소리 Mar 04. 2021

2018년 3월 2일, 독일의 밤 기차에서

의식의 흐름에 따른 기록

출장차 머물렀던 독일 시골에서의 시간을 뒤로 하고 C의 차로 뮌헨으로 향하는 기차역에 닿을 때까지만 해도, 까마득한 어둠을 헤치고 예약한 호텔에 잘 도착할 수 있으려나 하는 염려가 가득했다. 핸드폰 배터리도 잘 충전해 둔 것은 물론 보조배터리까지 챙겼다. 오늘 밤에 묵을 호텔 숙박비를 제외하고 수중에 가진 돈이 43유로뿐이라, 머물렀던 숙소에 팁을 두둑히 주고 싶었지만 다음날을 위해 잔돈만 싹 털어서 팁을 주고 나왔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DB앱으로 체크한 기차요금이 29유로에 불과했기 때문에 큰 염려도 없었다. 14유로면 공항 리무진 타고 다음날 점심으로 샌드위치 하나 정도는 해결할 수 있는 돈이니까. (독일은 카드로 할 수 있는 게 쇼핑밖에 없더라. 음식값도 20유로 넘어야 카드계산 되고, 독일카드 아니면 안받아주는 곳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기차 시간을 10여분 앞두고 역에 도착해 기차표를 사려고 하니, 티켓 가격이 43유로로 그새 껑충 뛰어 있었다. 회사에서 요금을 커버해 주는 것이 아니고서야, 표를 미리 사지 않았던 것은 분명 후회할 만한 일이었다. 더 무서운 것은 43유로를 싹싹 긁어 내고 나니 정말 말 그대로 ‘Broke’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43살이 되어야 결혼하는 건 아닐테지만) 43이라는 숫자가 나의 운명의 숫자인가, 하는 우스운 생각마저 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남의 나라에서 밤기차를 홀로 타고 숙소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 것인가? 통화가 되는 심카드를 가져 온 것이 신의 한수라고 생각함에도 엄청난 도전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현금이 없어 저녁도 굶게 생겼다고 낑낑대는 C(50대, 어깨선마저도 영락없는 베네딕트 컴버배치 닮은꼴, 스물 먹은 아들이 있으며 사별한 싱글)에게 남은 유로를 조금이라도 주고 가고 싶었지만 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한 푼도 없을 수가 있지? 뜻하지 않게 마주한, 돈 없이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을 통해 큰 깨달음이라도 얻어야 하는 시점이란 말인가.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다행히도 만일을 대비해 가져온 안 쓰는 엔화 14,000엔이 있었지만, 환전소가 다 닫혀 있을 시간에 역에 도착할 게 뻔한데 당장 쓸 수도 없을 엔화가 다 무슨 소용인가. 그 와중에 기차시간이 5분 지체되는 바람에, 홑껍데기만 입고 온 C가 춥다고 투덜거리는 것을 일주일 내내 듣고도 5분을 더 들어야 했지만.


평생에 언제 다시 보게 될런지 모를 C의 배웅을 받으며 가까스로 전재산을 탈탈 털어 오른 밤기차에서는 짙은 선팅으로 인해 차창 밖 풍경을 볼 수 없었다. 빛의 잔흔이 이따금 창 안으로 뚫고 들어오지 않는 한은, 유리창이랍시고 붙어있는 그것은 시커먼 거울에 불과했다. 45분 남짓을 우두커니 거울과 마주하는 동안은, 하룻밤 자고 비행기에서 이틀밤을 자고 나면 드디어 만나게 될 연인에 대한 생각만이 간절해지며 내 눈에 비치는 그의 모습을 한층 더 그리워하게끔 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칠 나의 모습마저도 더욱 바라보고만 싶어지는 것이었다. 


낭만에 가득 사로잡혀 열심히 시를 끄적이다 보니 어느새 Ulm에 다다랐다. 노트와 펜을 추스르고 뮌헨으로 향하는 기차가 오는 플랫폼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가족과 친구들을 준답시고 실컷 사 모은 선물들이 캐리어 속에서 묵직하게 달그닥거렸다. 내 몸무게 절반에 달하는 짐을 끌고 지하로, 다시 지상으로 플랫폼을 오가며 다시는 출장 선물 따위는 사지 않을테다- 하며 굳은 다짐을 해 보았지만 그런다고 나의 짐이 가벼워질 리도 없을 노릇이었다. 그 무거운 걸 끌고 가까스로 플랫폼에 도착해서는 2등칸이 시작되는 C칸 앞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우두커니 앉아 싸라기눈이 내리는 걸 바라보았다.


DB 앱에서는 내가 타려던 뮌헨으로 향하는 기차가 연착되고 있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내가 타려던 시간에 뮌헨행 기차가 금방 내 눈 앞에 나타났고,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망설임없이 기차에 올라탔다. 그게 대모험의 서막이었다. 독일에서 기차를 타고 장거리를 왔다갔다하는 게 처음이었던 만큼, 맨 처음 탔던 기차의 모습에 대한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큰 난관이 들이닥친 건 내 앞에 다다른 뮌헨행 기차에 타고부터였다. 이게 내가 타려던 기차였던가? 하고 기웃거리는 사이 기차는 플랫폼에서 차츰 멀어져만 갔다. 


분명 이 기차의 C칸은 2등석이어야 하고, 내가 아는 2등석은 KTX 2등석처럼 4명 단위로 테이블을 끼고 마주보는 좌석들이 2열로 펼쳐져 있어야 하건만, 진행방향의 좌석은 일반 좌석이 아닌 식당칸이었고, 반대쪽 좌석은 4명 단위로 유리로 된 칸막이가 쳐져 있어서 1등석이 아닐까 싶었다. 심지어 그 객실의 유리 칸막이 안으로는 내가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말인즉슨 이 열차는 내가 타려던 그 열차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단 말인가? 엄청난 속도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기차에서 내 마음대로 내릴 수도 없는지라,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에서도 이 열차의 상황을 최대한 파악해야만 했다. 자리에도 앉지 못한 채 식당칸과 1등석(으로 보이는) 사이의 어정쩡한 위치에 혼자 낑겨서는, 24인치 캐리어에 우두커니 걸터앉아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먼저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이 열차가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 그래서 모로 가도 뮌헨에만 갈 수 있다면 최악의 상황보다는 나은 것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의 난관은, 이 기차가 뮌헨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만일 이 기차가 내가 탔어야 하는 기차보다 훨씬 비싼 기차라면 추가요금 혹은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은 14,000엔과 한국 여권 그리고 구텐탁밖에 모르는 독어 실력이었다. 만약 부정승차로 몰려 벌금을 물어야 하는 무서운 상황이 닥친다면 그동안 받아온 명함을 뒤져 한밤중에 회사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서 SOS라도 쳐야 하나, 온갖 암담한 상황만이 그려졌다.


그렇다면 지금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먼저 이 기차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다행히 내가 있는 곳에서 볼 수 있는 비행기 이코노미석 스크린만한 화면으로 행선지와 기차번호를 찾을 수 있었고, DB앱으로 기차번호를 검색해 보니 이 기차가 뮌헨으로 가고 있는 건 맞았다. 1차적으로 국경을 넘는 극단적 상황만은 면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젠 좀 앉고 싶었다. 아무리 빨라도 2시간은 주구장창 달려야 뮌헨에 도착할 터이니 어떻게든 내가 있을 만한 곳을 찾고 싶었다. 현금이 없으니 식당칸도 내가 있을 곳은 못 되었지만, 식당칸이 B칸이라면 A칸에 내가 앉을 만한 곳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C칸을 뚫고 D칸으로 건너가는 건 무의미한 상황이었고, 어차피 내 마음대로 열차에서 내리지도 못하는 상황이니 A칸으로 전진해 보기로 했다.


식당칸에서 맥주 한 잔씩 걸치며 너그럽게 앉아 있는 푸근한 노인네들을 지나 가까스로 A칸에 다다르고 보니, 다행히도 이곳은 유리 칸막이가 쳐진 C칸에 비하면 다소 친근한 모습의 좌석들이 줄이어 펼쳐져 있었다. 머리를 쓰느라 너무 지친 나머지 (내겐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건 불가능하긴 하지만) 더이상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무거운 짐짝을 저 멀리 캐리어 두는 공간에 던져놓은 채 빈 자리에 기대어 앉았다. 


이제 잠깐 숨 좀 돌리려나 싶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자리에 몸을 기대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건 Reservation이라는 사인이 자리마다 좌석 위에 표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 앉아있는 좌석에는 Reservation 사인에 불이 들어와 있는데, 내가 걸터앉은 ‘아무 자리’에는 불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순간 상사가 지나가듯 이야기했던 지정석엔 추가요금이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A칸에서 내가 어디로 더 가겠으며, 이곳의 모든 좌석이 지정석인데 어찌한단 말인가. 


이 악몽같은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옵션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기차에서 내려 내가 탔어야 하는 기차를 기다려서 다시 타거나, 철판을 깔고 아무일 없던 척 기차에 앉아 가다가 검표원이 나타나면 담판을 짓거나, 아니면 화장실에 숨는 등 검표원을 요리조리 피해다니는 것. 하지만 이 기차에서 화장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택지는 둘로 좁혀졌고, 설상가상으로 기차가 달리는 동안에는 와이파이 접속상태가 엉망이었기 때문에 내가 탄 기차와 탔어야 하는 기차의 루트가 동일한지를 체크할 수가 없었다. 내리는 것마저도 또다른 모험이 시작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벌금을 안 내고 무사히 살아남기만을 간절히 바라야 할 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빨리 마무리지어야 하는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사실 내가 묵기로 한 호텔은 이미 내 예약을 제멋대로 취소해 버린 전력이 있었다. 자기들은 유니온페이 카드를 안 받는다며 예약을 당일날 취소해버린 바람에, 공항에서 리무진을 타고 뮌헨 역에 내리자마자 호텔이 없는 황당한 상황에 맞닥뜨렸던 것이었다. 회사 정책상 100유로 미만의 객실을 예약했어야 하건만, 새 호텔을 찾다가, 핸드폰의 화폐단위가 파운드로 되어있는 바람에 조식도 안 포함된 91파운드(지금도 기억난다 104유로)짜리 호텔을 91유로로 생각하고 예약하는 대 실수를 저질렀다. 숙박 당일 예약건은 취소해도 환불이 안되는지라 울면서 그 호텔에 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출장 일정을 마치고 뮌헨에서 귀국 전에 묵을 수 있는 가격대비 괜찮은 호텔이라곤 결국 나를 쫓아낸 그 호텔 뿐이었다. (그 바람에 전에 잡아두었던 비싸고 좋은 호텔의 예약을 취소해야 했던 건 물론이다) 이놈들이 내 예약을 또 취소하면 그때는 더 당황스러운 일들이 펼쳐질 게 뻔했고 어떻게든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검표원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똥줄이 타는 와중에도 마음을 추스르고는 주변 승객들의 눈치를 살피며 호텔에 전화를 걸어 보니, 천만다행으로 자기들은 24시간 체크인 가능하니 예약 취소가 될 일은 없단다. 이젠 기차에서 뮌헨으로 가는 동안 트러블 없이 호텔에 무사히 살아서 돌아갈 일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제 모든 선택지는 내 손을 떠났고, 나는 다가올 운명을 처절하게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뮌헨 중앙역 직전의 뮌헨 어쩌구 하는 작은 역에 도착하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기차에 올라타서 여기저기 아무 좌석에나 털썩털썩 주저앉는 게 아닌가. 순간 당황한 나머지 주위를 둘러보니, Reservation 사인의 불빛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내가 뭔가를 잘못 알았나? 이건 모두 기우였고 착각이었단 말인가. 물론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였지만.


극심한 감정기복을 겪으면서도 초지일관으로 검표원 따위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은 채 기차에서 내리기를 바랐건만, 저 멀리 빨간머리에 뿔테안경을 쓴 깐깐하게 생긴 검표원은 기어이 이 칸에 등장해 제 역할을 시작하고야 말았다. 이런저런 정황에도 불구하고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 결과를 속단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은 점점 나의 숨통을 조여왔고, 절박함 속의 긴장이 나를 꽁꽁 묶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내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곤 기도 뿐이었다.


유난히 날카롭고 까다로운 인상에 비쩍 마른 그녀가 앙상한 손으로 내 앞자리에 앉은 이들의 티켓을 낚아채어 훑어보곤, 무표정한 얼굴로 티켓에 구멍을 뚫은 뒤 표를 돌려주는 것을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실 이젠 더이상 긴장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내 차례가 오는 것도 아무래도 좋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적어도 기차 한 번 잘못 탔다고 여기서 죽어서 내리지는 않을 테니.


결국 저승사자마냥 무서웠던 빨간머리 뿔테안경의 검표원이 나에게 다가왔다. 긴장과 스트레스에 시달린 나머지 감정이 메말라붙은 와중에도 살아 보겠다고 벙글거리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고는, 할 수 있는 한 자신만만하고 천연덕스럽게 나의 티켓을 내밀었다.


“Danke!”


빨간머리 뿔테안경의 그녀는 나에게 싱긋 미소를 짓고는 유유히 제 갈 길로 사라져 갔다. 나의 손에는 상쾌한 소리와 함께 구멍이 뚫린 43유로짜리 티켓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호텔 방에 들어가 영수증을 정리하려고 지갑을 열어 보니, 빳빳한 5유로 1장이 영수증 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나의 우스운 꼴을 아무 말 없이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대로 침대에 털썩 누워, 천장만 멍하니 보았다.


돈이 없는 것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기차를 잘못 탄 것도, 밤늦게까지 싸돌아다녀야 하는 것도, 묵을 방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도, 사실은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니었다.


—-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에는 대부분 실체가 없다. 과거 양상이 어떠했든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다수의 경우 일어날 법할 일을 두려워하게 마련이지만, 대부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최악의 상황이라 한들 죽음이나 상해, 엄청난 재산상의 손실 혹은 명예의 실추와 직결되는 경우 또한 사실상 매우 드물다. 두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지혜이다. 때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될지라도, 맹목적 두려움의 실체를 발견하고 나면 정말 하찮은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으로 인해 나 자신이 싫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실체가 없는 것을 두려워하던 어리석음을 발견하고 자기 혐오에 빠지느니, 두려움을 직면하는 정신의 근육과 위기 대처능력을 키워서 어떻게든 버티면서 죽을 때까지 나를 좋아할 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