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거 Sep 14. 2020

도시를 위하여

누추한 그림자 위 찬란한 도시

이 화려한 도시를 누비는 것 또한 일종의 특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벽녘부터 도시는 분주하다. 전날 늦은 시간까지 기능을 멈추지 않은 탓에 쏟아져 나온 일종의 부산물을 처리하는 과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도시에 얼추 햇빛이 비추기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이 거대한 회색 유기체는 활동을 시작한다. 아드레날린이라도 뿜어져 나온 것처럼 혈관처럼 뻗은 지하터널에는 은회색 지하철이 쉴 새 없이 다닌다. 가빠진 숨을 진정시킬 틈도 없이 도시는 사람과 차와 시간과 자원을 빨아들이고 내뿜는다. 이것은 거대한 회색 유기체다. 그 가운데 어디쯤엔 분명 심장이 뛰는, 들숨과 날숨을 거칠게 반복하는 거대한 살아있는 기계다.


해가 진다한들 이 살아있는 기계는 멈추지 않는다. 떨어지는 해를 땅끝으로 집어삼키며 자신의 불빛을 뽐내기 시작한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신경계는 각종 전달 물질을 받아들이고 내보내며 번쩍 거린다. 이 화려함에 압도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매캐한 도시의 혜택을 누리는 이곳의 시민들은 허탈하고도 개운하지 못한 기분을 짊어지고 그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그들은 모두 팔뚝에 가느다란 관이 달린 바늘을 꽂고 있다. 다들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일절 언급하지 않는 그것을 기꺼이 달고 이 도시의 호흡에 맞춰 살아간다. 이 회색 유기체를 움직이는 것은 전부 그들의 팔뚝에 꽂힌 바늘에서 온다. 검고 딱딱한 사막에 솟은 차고 단단한 건물과 그 사이를 누비는 대가를 치르기 위해 모두들 어느샌가 그들의 팔뚝에 바늘을 꽂아 넣었다.


뿔뿔이 흩어지는 저들은 어찌 됐든 이 도시 한 구석에 자신의 자리를 갖고 있다. 도시의 심장부에서 고작 한 꺼풀만 벗겨내면 그들의 고단한 거처를 찾을 수 있다. 하루 종일 뽑아낸 그들의 것의 한 움큼을 이용해 이제는 몸과 머리를 누일 곳까지 가는 가로등을 밝힌다. 초라한 발걸음과 흐릿한 뒷모습들은 연기처럼 흩어져 그들의 자리로 빨려 들어간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지난 주말 가져온 어머니가 끓여주신 국이 차갑게 식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주인지 지난 달인 지 조차 모르겠다. 분명 언젠가는 덥혀졌던 가슴이 언제부터 냉랭한 것인지 뭉개진 목소리로는 대답할 수 없다. 하나 더 고백하자면 그 어떤 또렷한 외침도 듣지 못할 것이다. 냉랭한 가슴에 달린 귀는 도시의 부름 외에는 잘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삐뚤어진 바늘 탓에 새빨간 피가 흘러나온다. 언젠가 바다에서 이렇게 진하고 빨간색을 본 적이 있다. 수평선 너머에서 해는 선혈 같은 빛으로 구름을 쪼개며 솟았다. 솟는 해를 보며 심장이 두근거리자 덜컥 겁이 났던 것 같다. 혹시 꿈에서라도 다시 그 해를 본다면 심장은 두근거리며 피를 뿜을지 궁금하다. 아마 그렇다면 내 심장도 그 해처럼 빨간색이겠지. 오늘 해가 솟는 꿈을 꾼다면 아침에는 꼭 한 숟가락 국을 삼키고 집을 나서겠다.

작가의 이전글 하얀 절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