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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Oct 29. 2020

시 문학 속 서울

다양한 문화와 예술이 공존하는 서울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사랑받는 시를 썼던 시인들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다. 예술문화 역사에 이름을 굵게 새길만큼 아름다운 문장을 남긴 시인의 흔적을 따라가 보니 그곳에는 수려한 풍경이 있었다. 한 편의 시가 마음을 적시는 날, 감성적인 시인의 삶과 문학의 궤적을 밟아본다.


성북동

성곽이 동네를 감싸고 있는 성북동은 문학과 예술의 향기가 짙은 마을이다. 많은 문인들이 성북동에 터를 잡고 살면서 자연을 노래하며 아름다운 문장을 써내려 갔다. 조선 후기부터 마을에는 김정희, 이덕무, 채제공 등 문장가들이 성북동에 와서 시를 지어 자연을 노래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사대문과 가까우면서도 옛 정취가 남아 있는 성북동으로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청록파 시인으로 잘 알려진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이 까만 밤을 밝히며 ‘청록집’ 발간을 논의한 곳은 성북동 조지훈의 집이었다. 

시인 조지훈은 자신이 머물렀던 집마다 ‘방우산장’이라 불렀다. 방우산장이란 ‘마음속에 소 한 마리 키우면 직접 소를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없다’라는 ‘방우즉목우(放牛卽牧牛)’의 사상을 담고 있다. 한성대입구역에서 북악산 쪽으로 걸어다가 보면 청록파 시인들과 시를 이야기했던 집은 1968년 철거돼 터만 남았고, 도로변에 격자문과 작은 마루, 여러 개의 의자가 놓인 방우산장 건축조형물을 세웠다. 조지훈 시인의 방, 그의 삶의 공간을 재현한 곳이다. 조지훈이 살았던 시대상을 고려해 한국 전통가옥의 마루와 처마를 살리고 그 안에 자연 공간을 두어 내부와 외부의 공간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조지훈 집터 방향으로 문을 내어 그가 30여 년간 살았던 집터를 바라보고 있다. 


‘자유문인협회’ 초대회장인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은 성북동에 살며 자신이 사는 마을의 변화를 시로 표현했다.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성북동 168-34번지 주택에서 살았다. 언덕 위에 있던 그의 집터에는 오래된 빌라가 들어서 있고 도로변에 집터의 흔적만 남아 있다. 김광섭 시인은 성북동에 살던 시절 월간 문학잡지 <자유문학>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많은 신인 작가를 길러냈다. 시 <봄>, <생의 감각>, <성북동 비둘기> 등은 그가 성북동에서 썼거나 구상한 작품들이다.


시인 백석은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고, 이후 수많은 작품을 남긴 우리나라 대표 시인이다. 여전히 사랑받은 백석의 흔적이 묻어있는 길상사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백석은 연인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주며 아끼고 사랑했지만 만주로 떠난 후 한국전쟁이 발발해 남북이 갈라져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자야는 평생 그를 그리워했다. “그까짓 천억 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며 시가 천억 원이 넘는 요정 대원각을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감명받아 시주하려 했으나 스님은 거절했다. 오랜 세월 청한 끝에 스님은 시주를 받아들였다. 1997년 5월 대원각은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서울분원으로 탄생했다. 길상사에는 ‘시주길상화공덕비’가 있다. 법정 스님이 길상화라고 법명을 지어준 자야 김영한의 생애와 백석의 시 <나와 타냐샤와 흰 당나귀>도 새겨져 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성북동 언덕의 조용한 사찰 길상사에는 백석과 자야, 법정스님의 ‘무소유’까지 풍경처럼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북촌

봄에는 팝콘 같은 벚꽃, 가을에는 노란 은행잎이 날리는 정원이 아름다운 정독도서관은 예전에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였다. 시인이자 영화감독, 신문기자였던 심훈은 아름다운 모교에서 시심을 다스렸던 것일까. 그의 시 ‘그날이 오면’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시학 교수가 노벨문학상에 버금가는 시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이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정독도서관 부근은 조선 제일의 충신 성삼문의 살던 곳이기도 하다. 정독도서관 입구로 들어서면 ‘성삼문선생 살던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조선 시대 이름 높은 학자부터 현대의 시인까지 이 터를 거닐었으니 정독도서관이 있는 자리는 가히 중등교육의 발상지라 할 만하다. 


정독도서관을 나와 윤보선길을 따라가면 님의 침묵의 시인이자 승려인 한용운의 흔적이 담긴 사찰 선학원이 있다. 

‘님은 갔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은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한용운은 일제강점기 일제가 사찰령을 제정하고 한국불교를 왜색화하려고 하자 이에 맞서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했다. 많은 승려와 불교계 인사,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만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민족불교를 계승하기 위해 선학원을 설립했다. 선학원은 일제강점기 항일 ‘민족불교의 성지’였다.



길을 돌아 나와 가회동 한옥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면 서울 동서남북 네 방향의 내사산과 한양도성 경복궁 일대, 청와대 춘추관, 북촌 한옥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가 있다. 그 자리에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 맹사성의 집터가 있다. 청백리의 상징으로 조선 세종의 곁에서 가장 오랜 기간 좌의정 자리에 있었던 맹사성은 시조 <강호사시가>에서 자연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춘하추동 사계절에 빗대어 노래했다.   

 



정동 문화유적

덕수궁 옆 정동길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새어 나온다. 조선왕조 궁궐 역사의 무대이자 근대문물의 산실이었던 곳에는 문학인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시인 김소월의 모교였던 배재학당은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가 1885년 8월에 세운 학교로 처음에는 주변 민가를 교사로 사용했다. 김소월을 비롯해 조지훈, 주시경, 나도향 등 수많은 근대 지식인을 배출했다. 고풍스러운 벽돌로 지은 배재학당은 정면 현관과 양 측면 출입구가 건립 당시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건축미와 신교육의 발상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내부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된다. 배재학당 7회 졸업생인 김소월의 <진달래 꽃>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배재학당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소월이 배재고보 재학 시절 시와 소설을 싣고 편집도 했던 배재학당의 교지 <배재>에는 졸업반 시절 직접 쓴 편집 후기를 남겼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33년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지금도 사랑을 받는 시인의 문장처럼 정동 덕수궁 돌담길을 사뿐히 걸으며 마음에 담긴 시 한 편을 읊조려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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