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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Oct 29. 2020

소설 속 서울

격동의 근대사를 거치면서 크게 발전한 서울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이를 배경으로 근현대 작가들은 변화하는 서울의 풍경 속에서 시대를 반영한 작품을 많이 썼다. 서울을 무대로 굴곡진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 속 풍경을 따라 가본다.


박태원의 천변풍경 속 청계천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1930년대 청계천변에 사는 서민들의 일상과 세태를 담은 소설이다. 1933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에 저항한 ‘구인회’에 가입해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 모더니즘 작가들과 활동했던 박태원은 1938년 단행본으로 출간된 <천변풍경>에서 긴 문장에 쉼표를 많이 사용한 독특한 문체로 여러 인물의 삶을 나열하고 있다. 사람 이야기와 더불어 청계천변의 빨래터, 이발소, 한약국, 카페, 신전(여관), 술집, 우미관 등 1930년대 서울의 풍경이 소설 속 공간으로 드러난다. 

천변풍경 여행은 광교의 박태원 생가터인 한국관광공사 서울센터에서 시작한다. 건물 앞을 흐르는 청계천은 예전에 빨래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간간히 부는 천변 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는 하다. 그래도 이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들 시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소설 속 청계천 빨래터는 동네 아낙네들이 풀어내는 수다로 이웃들의 사는 이야기가 낱낱이 그려지는 공간이다. 

또 다른 공간 이발소에서는 소년 재봉의 눈을 통해 천변 풍경을 관찰한다. ‘오늘도 이발소 창 앞에 앉아, 재봉이는 의아스러운 눈을 들어 건너편 천변을 바라보았다. 신수 좋은 포목전 주인은 가장 태연하게 남쪽 천변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운데 다방골 안에 자택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그가 종로에 있는 그의 전으로 나가기 위하여 그 골목을 나와 배다리를 건너는 일 없이, 그대로 남쪽 천변을 걸어, 광교를 지나가더라도 우리는 별로 그것에 괴이한 느낌을 갖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이발소 소년이 묘사한 종로구 관철동으로 나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우미관터가 나온다. 우미관은 종각 근처에 있던 영화관으로 1910년 ‘고등연예관’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1915년 우미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단성사, 조선극장과 더불어 사랑받았던 우미관은 당시 2층 벽돌 건물에 1천여 명이 관람할 수 있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으나 항상 그 배가 넘는 관람객이 들어차 ‘우미관 구경 안 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할 정도로 이름났다. 지금은 종로 2가 패스트푸드 점포 앞에 ‘우미관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참, 나, 어젯밤에 야시에 갔다가 그길루 우미관엘 들어갔지. 야, 아주 신나더라. 후도 깁손(Hoot Gibson, 미국 헐리우드 서부영화 인기배우)이 악한들을 막 집어치는데......어떻든 활극은 지일이야 지일.” 시골에서 처음 올라와 청계천변 한약국에서 일하게 된 어리고 순진했던 열네 살 소년 창수는 서울에 온 지 반년도 채 못되어 도회에 감화된다. 우미관으로 영화를 보러 다니며 동네 소년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소년은 그해 봄 서울로 상경하면서 신기해 마지않았던 소년이 아니었다. 


청계천변을 따라 걷다 보면 고층빌딩 앞에서 베를린 광장을 만난다. 아담한 광장에 서 있는 콘크리트 장벽은 1961년 동독 정부가 세운 베를린 장벽 일부다. 1989년 독일이 통일되면서 철거한 장벽을 베를린시 마르짠 휴양공원 안에 전시해 놓았는데, 그 일부를 청계천을 복원할 때 서울시가 기증받았다. 작은 광장에는 장벽과 함께 베를린시의 상징인 ‘곰’ 상과 100여 년 전에 만든 독일 전통 가로등을 옮겨와 벤치와 함께 설치했다. 


베를린 광장을 지나면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수표교가 나온다. 1441년(세종 23), 마전교 서쪽에 수표를 세워 청계천 수위를 측정해 홍수에 대비했다. 이곳에 우마시전(牛馬市廛)이 있어 마전교라 불리다가 이후 수표교로 이름을 바꿨다. 수표교를 건너면 노동자의 고통을 대변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기념관이 나오고 맑은 천변을 계속 따라가면 110여 년의 전통을 이어온 광장시장까지 이어진다.    


 

이범선의 오발탄 속 해방촌

1959년 발표된 이범선의 <오발탄>은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암울한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주인공이 사는 해방촌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해방촌은 일제강점기 사격장이 있던 곳에 1945년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온 해외동포, 한국전쟁 후 북쪽에서 월남한 사람들, 전쟁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만들어진 동네다. 서울의 상징인 서울타워가 있는 남산 아래 동네,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도심 한복판 해방촌은 한마디로 ‘서울 같지 않다’.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은 전쟁 중 삼팔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와 해방촌에 정착한 한 가족의 삶을 다뤘다. ‘무슨 하늘이 알 만치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큰 지주로서 한 마을의 주인 격으로 제법 풍족하게 평생을 살아오던 철호의 어머니 눈에는 아무리 그네가 세상을 모른다고 해도, 산등성이를 악착스레 깎아내고 거기에다 게딱지 같은 판잣집들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이 해방촌이 이름 그대로 해방촌(解放村)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발탄 속 해방촌 여행은 보성여자중고등학교에서 출발한다. 보성여중고는 1907년 평안북도 선천에 미국인 선교사와 한국 기독교인들이 함께 ‘예수교 보성여학교’로 설립했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앞장섰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경영권을 박탈당했다. 1950년 서울로 이전해 보성여자중고등학교로 다시 개교했으며, 1955년 월남한 선천 사람들이 학교를 해방촌으로 이전했다. 학교 바로 옆에 있는 해방촌 성당은 한국전쟁이 휴전되고 해방촌으로 이주한 사람 중에 천주교 신자가 늘자 천주교 본당 설립이 추진되어 1955년 완공되었다. 성당에서 조금 더 걷다 보면 교회가 나온다. 해방예배당은 해방촌에서 가장 높이 솟은 고풍스러운 건물로 1950년대에 설립되었다. 교회를 지나 해방촌오거리로 나오면 소설 속 풍경처럼 오거리로 이어진 비탈 골목에 주택들이 다닥다닥 모여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 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

해방촌오거리에서 조금 내려가면 오래된 낡은 건물에 신흥시장이 있다. 시장으로 들어서는 골목이 을씨년스럽지만 시장 안에는 젊은 예술가들이 이색적인 카페와 펍(pub)을 열고 예술의 거리를 조성했다. 시장은 낡은 아날로그의 모습과 이국적인 풍경이 어우러져 독특한 매력을 뿜어낸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로도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시장을 나와 미로 같은 어느 골목에 들어서니 하늘까지 오를 듯 끝이 보이지 않는 108계단이 있다. 아득한 계단을 어떻게 올라갈까 하는 고민도 잠시, 계단 한가운데에 승강기가 운행되고 있었다. 108계단 경사형 승강기는 서울시 주택가에 처음 설치된 것으로 층이 나뉘어 계단 중간쯤에서 내릴 수도 있다.


빨강, 파랑, 흰색, 삼색등이 돌아가는 이발소가 눈에 많이 띄는 동네, 좁은 골목 전봇대 전깃줄이 엉키어 하늘을 가르는 동네, 하늘과 가장 가까운 동네, 해방촌에서 내려다본 노을 젖은 서울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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