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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Sep 15. 2019

성지순례길

서울의 역사 속에서 신앙의 역사는 피와 눈물로 일궈낸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울순례길’은 종교·문화유적지가 하나로 이어진 길로, 특정 종교를 위한 길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역사문화유산이다. 도성 안의 궁궐과 빌딩 숲에 어우러진 근대 종교 건축물을 따라 서울의 순례길을 걸어본다.       


서소문 순교성지와 기념성당 약현성당

중구 중림동, ‘서소문 밖 네거리’라 불렸던 서소문 순교성지는 조선시대 천주교인의 처형장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를 거치며 수많은 신자가 이곳에서 순교했다. 한국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에는 이곳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이야기와 중림동 약현성당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다. 목판 인쇄본인 ‘을축년첨례표’는 교회에서 기념하는 축일을 날짜 순서로 기록한 것인데, 한국교회의 축일표 중 가장 오래된 최초의 첨례표를 소장하고 있다.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순교성지의 현양탑에서 참배했다.

1887년 수렛골(지금의 순화동)에서 한옥 예배당에서 출발한 약현성당은 당시 이곳에 약초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서소문 밖 순교지’를 내려다보며 중림동 언덕에 약현성당을 지었다. 1892년, 명동성당보다 6년이나 먼저 세워진 한국 최초의 고딕 양식 벽돌조 성당이다. 명동성당이 완공되기 전까지 주교좌성당의 역할을 했다. 약현성당은 1977년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본성당 건물과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이 있는 한국 가톨릭 문화의 중심지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 자주 등장할 만큼 아름다운 건축미를 간직한 성당은 1998년 방화로 성당 내부가 소실되었다가 복원됐다.     


처절한 순교의 역사 절두산순교성지

양화나루 잠두봉은 풍광이 아름다운 조선시대 명승지였다. 양화나루 너머로 지는 노을은 ‘양진낙조’라 불리던 마포팔경 중 하나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한강변 언덕에는 핏빛으로 물든 슬픈 역사가 담겨 있다. 1866년 병인박해로 9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하자 프랑스 함대는 이를 보복하기 위해 1866년 9월과 10월, 조선을 침범했다. 

프랑스 함대가 거슬러 올라왔던 양화진에서 많은 신자가 처형됐다.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천주교인의 머리가 잘려 숨졌다고 하여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름마저 바뀔 정도로 처절했던 양화나루 언덕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성지로 조성됐다. 병인박해 100주년이 되던 1967년, 성당과 박물관을 세웠다. 순교 정신과 한국 전통미를 살려 설계한 갓 모양의 지붕과 지붕 끝에 미끄러져 내리는 추녀는 한강의 풍경과 어우러져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 건축물로 손꼽힌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사적, 서울 양화나루 잠두봉 유적으로 지정됐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처형됐지만 성당 제대 아래 성인 유해실에서 단 29명의 순교자만 기억할 뿐이다. 기념성당과 연결된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서는 순교자들의 흔적뿐 아니라 조선시대 문화와 선조들의 삶이 담긴 5천여 점의 유물과 자료를 보관하고 전시하고 있다. 1984년 5월,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찾아와 순교자들에게 뜨거운 눈물로 경의를 표한 순교성지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134년 된 한국기독교의 상징 정동교회

'언덕 밑 돌담길에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인 조용한 교회당', 어느 노래의 가사에서 처럼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정동길 한복판에서 아담한 교회를 만난다. 정동교회는 1885년,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가 설립한 감리교회다. 처음에는 ‘벧엘 예배당’으로 불린 한옥에서 예배를 보다가 신자 수가 늘면서 서양식 벽돌로 예배당을 지었다. 단층의 붉은 벽돌 건축물은 한쪽 끝에 종탑을 세우고 아치 모양의 창문을 낸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1897년 예배당을 건립했고,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무너진 교회를 복원하여 본래의 소박한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교회 근처에는 서구의 공사관이 모여있다. 근처에 있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청년들은 교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청년회에서 개화 운동과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19세기 교회의 붉은 벽돌 예배당은 사적으로 지정됐다.     


한국불교 대표하는 조계종의 총본산 조계사

서울 도심 종로 한가운데 있는 전통사찰인 조계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총본산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함께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계사는 1910년, 일제강점기에 조선불교의 자주화와 민족자존 회복을 염원하는 스님들에 의해 각황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됐다. 당시 각황사는 근대 한국불교의 총본산으로 근대 한국불교 최초의 포교당, 일제강점기 최초의 포교당이었으며 사대문(四大門) 안 최초의 사찰이었다.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은 일제가 정읍에 있던 보천교를 해체하면서 본당인 십일전을 조계사로 이전한 것이다. 조계사 대웅전, 용의 머리가 올려진 지붕의 용마루가 멋스럽다. 월정사 8각 9층 탑을 본떠 만든 석탑과 수령이 500년이 넘는 백송,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을 짓고 있는 아기 불상이 앉아 있는 경내는 종교라는 이념을 넘어 도심 속 시민들의 역사문화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시 등록문화재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서울 시청 건너편 중구 정동에 유럽풍의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한국 전통양식과 서양의 로마네스크 양식이 조화를 이룬다. 1926년 아더 딕슨(A. Dixson)의 설계대로 착공해 미완성된 건물에서 헌당식을 가졌다. 1996년 원래의 설계도를 찾아 본래 모습으로 완공했다. 1978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은 한옥 기와를 얹은 붉은 지붕이 빛을 발한다. 화강석과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건물 전체가 십자가 형상을 하고 있다. 

외관 못지않게 성당 내부의 모습도 아름답다. 성당 내부에는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돌기둥이 서 있다. 제단 벽면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그려진 모자이크 제단화는 영국인 조지 잭크가 11년에 걸쳐 조각해 채색한 등록문화재다. 지하성당에는 3대 교구장 트롤로프 주교의 유해가 동판 아래 안장돼 있다. 지하 성당에서 위층 대성당 제단과 종탑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의 곡선미와 2년 10개월에 걸쳐 제작한 예배용 파이프 오르간에서 울려 퍼지는 맑은 음색은 아름다운 성당에 경건함을 더한다.   


서울교구장 주교 집무실로 사용하는 전통미 가득한 한옥 건물, ‘경운궁 양이재’는 1920년 성공회가 사들여 이곳으로 이전했으며 서울시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성당은 종교적인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1987년 6월 10일, 전국적으로 번진 6월 항쟁이 주교좌성당에서 시작되었다. ‘유월민주항쟁진원지’로 이 자리에서 시작된 민주항쟁으로 민주화의 새 역사를 썼다.      


가회동 성당과 석정 보름 우물터

한옥마을이 있는 종로구 가회동과 북촌 일대는 한국 천주교 초기 신앙의 중심지였다. 1794년 중국에서 건너온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 신부는 1795년 4월 5일 부활 대축일에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계동 최인길의 집에서 활동했던 주 신부의 존재가 알려져 체포령이 내려지자 주 신부는 피신했고, 역관이었던 최인길은 사제 복장을 하고 주 신부 대신 체포되어 순교했다. 주 신부는 숨어 지내면서 활동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수많은 교인이 희생당하자 자수하여 순교했다. 

이들의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49년 가회동 성당을 세웠다. 한옥과 양옥이 조화를 이루는 성당 1층에는 한국 천주교회와 가회동 성당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천주교를 탄압했던 흥선대원군의 손자이자 조선의 마지막 왕족인 의친왕 이강이 안국동 별궁에서 ‘비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같은 해 의친왕비 김숙도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가회동 성당은 초대교회로서 첫 미사를 봉헌한 곳이자 마지막 황실 가족이 세례를 받은 곳으로 의미가 있다. 


계동길 주택가 앞에 북촌 주민들의 음수원이던 우물터가 있다. 석정보름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을 흐려진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다. 물맛이 좋기도 했지만 이 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궁궐 궁녀들이 몰래 떠 마시며 아이 낳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주문모 신부가 계동에서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이 우물물로 세례를 주었다.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도 이 물을 성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우물도 가슴 아픈 사연을 아는 것일까. 천주교 박해 당시 수많은 신자가 순교하자 갑자기 물에서 쓴맛이 느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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