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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우주 Sep 13. 2022

수용 혹은 포기에 대하여

28 Ⅱ. 죽음에 대하여 ⑧-3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마침내 찾아온 수용의 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러한 침묵의 순간이야말로 죽음을 앞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의미 있는 교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 함께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은 어쩌면 마지막까지 그의 곁에 있어주겠다는 하나의 약속일 수도 있다. 


환자 주변의 중요한 문제들이 해결되고 난 후, 이제 영원히 눈을 감는 것은 오직 시간문제라는 것을 환자가 알고 있을 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음을 환자에게 일깨워줄 수도 있을 것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혼자 남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수도 있을 것이다. 환자에게 힘주어 손을 한번 잡는 것,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다시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눕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말보다 많은 의미를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수도 있을 것이다. 


(중략) 끝까지 싸우려는 환자들도 있다. 그들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수용의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들은 최후의 순간에 ‘더 이상은 도저히 못 하겠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싸움은 그들이 멈추어야만 끝난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피하려 할수록,  죽음을 부정하려고 할수록, 평화롭고 품위 있는 ‘수용’의 단계에 도달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환자나 가족들이 이런 환자들을 용기 있다고 칭찬하면서 마지막까지 살기 위한 사투를 부추길 수도 있다. 그들은 은연중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비굴하게 포기하는 것이며, 배신, 심지어는 가족들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그렇다면 환자가 ‘너무 일찍’ 포기하는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의학적 치료와 함께 환자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조금 더 살 수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환자의 삶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 싶은 우리의 소망과 이제 그만 편안하게 눈을 감고 싶다는 환자의 소망이 충돌할 때, 환자의 상태가 수용의 단계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 때 우리는 환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는 것이다. 환자를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환자를 원망하게 될 것이며, 결국 환자의 마지막을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주1)


이어 W부인의 사례가 나오는데 환자는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에 이르렀으나 보호자인 남편은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최대한의 처치를 계속하며 기적을 바라는, 드물지 않은 이야기 같다. 저자는 이런 상황이 품위 있는 죽음을 바라는 환자에게 크나큰 고통을 야기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환자에게 죽음이 엄청난 안도감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환자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인간관계에서 서서히 벗어나도록 주변에서 도와준다면 훨씬 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그녀가 남편에게 원했던 것은, 언젠가 완쾌될 거라는 식의 겉도는 대화가 아닌 솔직한 감정들을 나누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죽음은 극복해야 하는 무엇이 아니다. 현대의학과 생명공학의 도움으로 세포의 수명을 늘리고, 노화를 지연하는 기술과 물질이 비상한 관심을 끌지만, 노화나 죽음은 질병이 아니며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다. 나도 내 소중한 것들도 그 순환을 벗어날 수 없다. 늙어서든 젊어서든 태어난 모든 것은 언젠가 불상의 시기에 죽는다. 


미미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기 열흘 전, 아이 복수가 차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매일 가서 천자(*주2)를 해서 빼내야 했는데 병원 셔틀은 물론, 처치 후 힘들어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것이 괴로웠다. 병원에서 배액관(*주3) 삽입이라는 '기술적 처치'가 가능하다고 대안으로 제시했다. 복수와 흉수를 언제든 빼낼 관을 몸에 달 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보니 미미에게 배액관을 삽입했다면 나는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배액관 삽입은 기술적으로 가능한 처치이나 아이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실익이 클 리 없었다. 단지 며칠을 더 사는 것, 그게 아이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보호자인 나는 간절히 바랐으나, 아이는 살 날의 길이보다 편안하고 따뜻한, 고요한 마지막 시간들을 원했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도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은 인간의 위대함이지만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또는 현실에서 달아나기 위한 거짓 희망이라면 경계해야 한다. 


“결코 포기하지 마세요.”

“모두가 포기해도 보호자는 포기해선 안 됩니다.”

“포기는 무지개다리를 건넌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런 말들을 경계해야 할 때가 온다. 그에 대한 답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통찰을 빌려야겠다. 


항상 그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그들이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그것이 절망의 포기가 아닌, 수용의 포기일 때, 우린 환자들에게 더 이상 희망을 강요하지 않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인 시기, 나는 해줄 게 없는데 병원에 매달리는 보호자였다. 신기루 같은 희망, 간절한 위로와 축원을 연료 삼아 매일 병원 문턱을 넘었다. 누구도 그 간절함을 비난할 수 없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아이가 앓는 병과 진행 단계를 직시하고 받아들였다면 달랐을 것이다. 무지개다리 앞을 서성이는 아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죽어가는 존재의 불안과 욕구를 가장 앞에 두었어야 했다. 그리고 평생 한 팀이었던 너와 나에게 우리 삶에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내가 아니라)의 두려움과 소망을 숙고했어야 한다. 허락된 시간, 짧디 짧은 생의 날들을 기적 같은 사랑으로 채웠어야 한다. 순간을 영원처럼.


동물이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다면 빠르게 포기하란 뜻이 아니다. 미리 비탄에 잠길 필요는 없다. 만성 신부전 같은 진행성 불치병도 건강한 고양이처럼 얼마든지 좋은 일상을 오래 영위할 수 있다. 보호자의 관리가 필요하지만 익숙해지면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노하우도 차츰 생긴다. 

 

우리의 자원이 죽음을 앞둔 동물의 의사와 무관한, 고통을 야기하거나 적어도 편하지 않은, 의미 없는 연명치료에 쓰이는 대신 개별 동물의 소망과 욕구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또한 보호자와 더 밀도있는 시간을 나누는데 쓰인다면 펫로스 증후군, 그로 인한 사회적 고통은 줄어들 것이다. 


*주1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죽음과 죽어감> P186~188. 이레 2008

*주2 : 복강 내에 주사침을 찔러 넣어 액체를 빼내는

*주3 : 체내의 액체나 삼출물을 쉽게 배출하거나 제거하기 위해 넣는 관. 불필요한 액체가 몸속에 고이지 않도록 밖으로 빼내는 역할을 한다.

*주4 : 앞의 책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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