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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우주 Sep 05. 2022

좋은 죽음이란

27 Ⅱ. 죽음에 대하여 ⑧-2

죽음이란 개별적이며 단 한번뿐인 경험이다. 어떤 죽음이 좋은 죽음인지 쉽지 않은 질문이 되는 이유다. 사람마다, 동물마다 좋은 죽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일생일대의 개별적인 사건에 정답이 있을 리 만무하다. 개별 동물의 질병 양상과 보호자의 가치관, 생사관에 따라 좋은 죽음의 정의는 달라질 것이다.


다만 나쁜 죽음에 대해선 사회적 합의라 할 만한 것이 있는 듯하다. 현대인들이 가진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면 된다. 극심한 고통, 중환자실에서 이루어지는 최대의 처치, 응답 없는 심폐소생술, 가족들의 절규, 환자와 가족의 고통에 무감한 의료진, 인사치레로 바쁜 남은 이들만의 장례식. 지금 이 순간도 그런 죽음을 죽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는데 우리는 책임감을, 적어도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내 소중한 존재가 그런 죽음을 죽지는 않을지, 나 역시 그렇지는 않을지 대비해야 한다.


나쁜 죽음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들여다보면 죽음에 대한 심한 터부 속에 무지가 만든 공포, 두려움이 낳은 불행한 관습이 죽음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가장 단단한 껍질은 부정이다. 세상만사 제일 쉬운 것이 부정이기 때문이다. 백만 배 어려운 것이 긍정이다. 죽음도 그렇다. 다가오는, 예견된 죽음을 부인하는 것이 현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쉽고 편리하다. 현실도피의 다른 이름으로 희망 혹은 기만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거짓 희망에 기대를 걸기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가능한 한 빨리 죽음을 인정하고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넷플릭스 <엔드 게임: 생이 끝나갈 때>는 미국 캘리포니아대 의과대학인 샌프란시스코 캠퍼스 병원에서 투병 중인 말기 환자들과 의료진들이 죽음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죽음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화두를 던지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죽음에 임박한 환자의 치료(또는 호스피스 돌봄)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주치의나 가족 한 두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주치의와 사회복지사, 임상 목회자(BCC chaplain), 간호사 등 환자를 만나는 다양한 전문가들이 먼저 치료 방향을 토론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다시 환자, 보호자와 솔직히 주고받는다. 말기 환자의 인생 경험을 존중하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 상호 충분한 대화와 교감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렇다고 환자나 가족들이 다가오는 죽음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호스피스 혹은 완화의료(pallative care)에 대해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의사가 완화의료 이야기를 꺼내자 환자의 어머니는 “호스피스는 죽음을 의미한다. 딸한테 그 얘기는 하지 말라”고 날을 세운다. 환자와 가족들에게 호스피스는 ‘죽으러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의사는 호스피스에 대해 “환자가 가능한 오래 살도록 한 인격체를 잘 살피고, 증상을 이해하도록 돕고, 필요한 정보를 통해 올바른 치료를 선택하도록 환자와 가족을 돕는다”고 설명하지만 공감을 얻지 못한다. 가족들은 마지막까지 호스피스 행을 거부하고 병원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죽음을 앞둔 당사자와 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고뇌도 잘 나타난다. 환자의 상태는 계속 나빠지고 극심한 고통과 불안을 호소하며 운다. 그런가 하면 반짝 좋아져 보호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날도 있다.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싶지 않은 가족들, 그런 이들을 두고 발걸음이 내키지 않는 환자의 마음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죽어감의 과정에서 이들은 때로 웃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환자와 가족들이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자명하지만 분명 나은 날이 있고, 그런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넷플릭스 <엔드게임>의 완화의료 의사 비 제이 밀러

이 다큐의 다른 한 축은 이 병원과 연계된 호스피스 ‘젠 호스피스 프로젝트’다. 호스피스를 운영하는 전문의 비 제이 밀러(B. J. Miller)는 프린스턴대학 2학년 어느 날 감전 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무릎 아래 두 다리와 왼쪽 팔을 절단한 장애인이다. 의족으로 능숙하게 걷고 멋진 바이크를 탄다. 그는 장애 때문에 의사라는 직업에 관심을 갖게 돼 의대에 진학해 완화의료팀(pallative care team)을 선택했다고 설명한다. 바꿀 수 없는 것(장애, 질병, 죽음)을 인정하고 스스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인간, 고통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부딪혀 깨부수는 수행자의 면모를 보는 듯하다. 다음은 그가 멋지게 차려입은 노부인 테클라 해먼드와 나눈 대화. 


의사 : 숨이 가쁜 증상도 얘기할 테지만 오늘 오신 더 큰 이유는 죽음 얘기를 계속해야 해서입니다.

환자: 숙제를 주셨잖아요. 

의사: 네

환자: 죽음과 친구가 되라고 했죠.

의사: 맞아요.

환자: 숙제를 못했어요, 실패예요.

의사: 그렇군요.

환자: 전 살고 싶어요(I'd love to live). 못 받아들이겠어요.

의사: 친구가 되긴 어렵겠죠. 하지만 관계를 맺으라는 숙제였다면 어때요? 죽음을 알아가는 거죠. 꼭 친해질 필요는 없어요. 알면 덜 무서울 거예요. 모르는 채 벽장에 가둬두고 쳐다보지도 않고 만지지도 않는 것 보다는요. 

환자: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 같아요. 내가 통제할 수 없고요.

의사: 그렇죠. 우리가 모르는 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일까요? 아니면 죽음 자체일까요?

환자: 둘 다요.

의사: 제 생각과 다르게 느낀다면 말씀해주세요. 죽은 뒤가 어떨지 알 방법은 없죠. 우리 힘으로 그것을 바꿀 수 없다면, 익숙해지는 것도 방법이겠죠. 그러니 죽음에 관한 한 우리의 목표는 익숙해지는 거죠. 그 수수께끼를 안고 사는데 적응하는 거죠. 수수께끼를 푸는 것보다도요.

환자: 그래요. 말이 되네요. 믿음도 필요할 것 같아요. 끔찍할 수도 있지만 멋진 일일 수도 있잖아요. 지금 제 인생은 멋지거든요.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의사: 직업이다 보니 생의 끝자락에 놓인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봤어요. 제가 여태까지로 본 바로는 인생이 어디를 향해 가든, 어떤 구렁텅이에 빠졌든 나쁘지만은 않더군요. 

환자: 그래요?

의사: 본 대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생사의 갈림길을 건너는 사람도 봤고,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도 있어요. 증명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알아서 나쁠 건 없잖아요. 제 경험으로는 그렇게 나쁜 건 아닌 것 같아요. 

환자: 그 증언들이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의사: 네, 내용이 다 비슷해요. 조금 더 믿음을 가질 근거만 찾아도 지금은 충분해요.

환자: 네.


아이의 주치의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통상 우리가 말기 환자의 보호자나 당사자로 병원에서 듣는 얘기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상투적인 표현 또는 하나마나한 모호(주*1)한 말들이다. 죽음에 대한 터부가 더욱 강한 우리나라에서 삶에 강한 의지를 가진 환자나 보호자에게 의사가 죽음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낯선 풍경이다.


이 의사는 말기 환자에게 그런 말들을 늘어놓는 대신 죽음과 인사할 것을 제안한다. 죽음과 관계 맺고 익숙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다독인다. 분명한 것은 누구도 죽음을 치료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인류가 일군 눈부신 의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의학보다 훨씬 큰 영역이다. 그리고 인간이 어찌하지 못하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의 인간다움이 드러난다. 


보호자 본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부터 직시해야 한다. 솔직하고 단순한 언어로 자신에게 죽음의 의미와 태도를 물어보자. 스스로의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서 소중한 존재(아이)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극히 모순적인 혹은 이기적인 태도가 아닐까. 혹은 자기부정이나 자기기만일 수도 있다. 본인의 죽음에 대해 명상한 뒤 아이의 죽음을 떠올려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죽어가는 존재의 편에서 생각하는 연습이 될 수 있다.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죽음과 죽어감을 기꺼이 생각하고 말해봐야 한다. 내 죽음을 떠올리고 그에 대한 느낌을 글로 써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무엇이 가장 두려운지, 그것은 사실에 기반한 공포인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닌지 똑 떨어지는 답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인간에겐 가면을 벗고 진실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보호자의 태도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반려동물을 평생 어린아이로 취급했다면 그러지 않는 것이 좋다. 생명을 다하고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은 어느 때보다 자신만의 의사와 욕구를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하는 때이다. 태어남과 죽음의 유사성을 비교하곤 하지만, 태어날 때와 가장 다른 점일 것이다.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따뜻한 몸을 매만지며 진솔하게 이야기 나누자. 이번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상의해보자. 동물이라고 다르지 않다. 대화의 기본 전제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인정이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을 때, 가장 중요한 문제를 의논할 여력이 있을 때 아이와 상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이 앞에서 울지 말라’, ‘아이가 포기하지 않도록 앞에서 죽음에 대한 언급을 해선 안 된다’는 조언을 많이 하지만 숨기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죽어가는 존재를 동요하게 할 보호자의 폭발적인 감정 표현은 피해야겠지만 진솔한 대화는 언제나 도움이 된다. 억지로 웃는 연기를 하는 것보다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로 취급하며 속이는 대신 슬픔을 나누고, 다가올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함께 준비할 수 있게 감정을 서로 나누는 것이 좋다. 그리고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알고 스스로 확신을 갖고 있다면 다른 세계로 여정을 시작하는 아이의 곁에서 조용히, 불안감 없이 그 과업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주1 :  그러나 같은 말도 죽음 수용의 단계 중 강한 ‘부정’ 단계에 있는 환자라면 이런 말들이 비수가 되기도 한다. 복막암 선고 후 적극적으로 항암 치료를 받던 가수 보아의 오빠인 권순욱 씨가 2021년 5월 SNS에 심경을 토로한 글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권씨는 “당장 이대로 죽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데 의사들은 왜 그렇게 싸늘하신지 모르겠다”고 냉담한 의사들을 비난했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삶의 의지를 불태웠던 고인은 그해 가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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