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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우주 Sep 22. 2022

돌봄의 경험이 내게 남긴 것 : <케어>

[내 고양이의 죽음에 대하여 35] Ⅱ. 책임에 대하여 ②

간병이나 돌봄은 피간병인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방향이 정해져야 한다. 그들의 고통, 그들의 좌절, 그들의 두려움에 대한 이해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간병인은 피간병인이 존재하는 바로 그 장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 그 장소가 아무리 황량하고 무력하게 느껴진다 해도 들어가야 한다. … (중략) 희망은 당위적인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있는 어떤 것이다. 희망이란 간병인이 피간병인의 고통에 합류하고 함께 견디면서 치료 과정에서 후퇴와 호전을 반복하는 와중에 사라졌다가 다시 형성된다.(*주1)


늙고 병든 내 고양이를 애지중지 돌보고 끝내 마지막 숨이 다하는 것을 함께 한 경험, 그 시간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이 책을 읽고 뒤늦게야 정리가 됐다. <케어>는 의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아서 클라인만이 치매에 걸린 아내를 10년간 돌본 경험을 통해 돌봄의 다층적인 의미를 탐구한 책이다.


소중한 존재의 죽음은 그 자체로 내 존재를 뒤흔드는 강렬한 경험이었다. 아이의 죽음 이후 내 안에서 삶을 향한 본질적인 무언가가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죽음관을 비롯해 삶에 대한 태도, 가치관이 변하며 이전의 삶과 같을 수 없는 균열이 일어난 것이다. 단지 소중한 존재의 죽음을 격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되돌릴 수 없는 변화는 아이의 죽음에 더해 그 과정, 즉 돌봄의 시간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는 혼자 죽지 않는다. 사람도 동물도 마찬가지다.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이르기까지 누군가 옆에서 죽어가는 이를 돌본다. 이는 간병 주책임자인 특정 개인의 막대한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며, 노인 간병이 사회 전체의 부담이 된 지도 오래다.


소중한 존재를 돌보는 일, 간병이라는 행위와 과정이 희생과 부담을 넘어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이 책을 읽으며 더듬더듬 알게 됐다. 순간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죽음, 그 지난한 여정에 참여하는 것이 돌봄이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사랑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고, 홀로 고귀하며, 독립적인 내 고양이가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 내가 녀석의 손과 발이, 의지와 마음이 되어 고단한 여정에 동참해야만 했다.


그 사랑은 돌봄의 과정을 통해 사랑이 새로워지고 더 커졌다. 내게 누군가를 온전히 돌볼 기회를 준 나의 작은 고양이는 삶에서 처음 경험하는 새로운 감정을 선물했다. 그 전에도 녀석을 무척 사랑했지만, 내가 이 친구를 소중히 여기며 돌본 그 시간들 속에서 새로운 사랑이 샘솟았다. 아프기 전에도 일상을 나누는 소중한 동반자로 아이를 마음 다해 사랑했지만, 간병을 통해 더 크고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느꼈다. 전에 알던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와 우주를 그저 긍정하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이랄까.(*주2) 비통함 속에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온전함의 감각은 놀랍게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돌봄의 과정 내내 나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충분하지 않다며 아이에게 미안해하고 스스로를 자주 책망했다. 나의 돌봄이 이 친구가 나에게 준 것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그렇지 않다. 아이를 돌본 동안 나는 가용한 모든 자원을 투입했다. 물적 자원은 물론이고 나란 사람의 시간과 마음 대부분을 아이에게 쏟았다. 경제적 생산을 위해, 사회적인 성취를 위해 쓰일 수 있는 한정된 자원을 내 죽어가는 고양이에게 주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석달, 허락된 시간을 절망적으로 소중히 여겼다.


흔히 ‘기브 앤 테이크’, 모든 관계의 본질은 주고받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준 물질적, 감정적 자원을 저울에 잘 달아서 그만큼을 받아내야 지속적인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받기만 하는 관계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가 있다. 가장 중요한 관계, 존재의 본질을 나누는 관계, 타자가 곧 나인, 1인칭 같은 2인칭과의 관계가 그런 것 같다. 나에겐 그것이 청춘을 함께 한 내 고양이였다.


흔히 우리가 칭송하는 아름다운 사랑은 성애적 관계, 혹은 부모 자식의 관계다. 다른 형태의 관계는 물론, 종(種)이 달라도 지고지순한 사랑이 가능하다. 백번, 천번, 만번을 속삭여도 충분하지 않은 “사랑해”. 열번의 사계절을 함께 보내며 밝은 태양 아래, 산들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 속에, 눅눅하지만 차분한 비의 기운 속에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며 온전한 존재로 마주 본 나의 하나뿐인 고양이. 봐도 봐도 좋은 한 내 아가.


아픈 동물을 돌보는데 자신을 갈아 넣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동물을 기르지 않거나 동물은 그저 동물일 뿐이라고 선 긋는 이들에게 혀를 찰 일이지만, 많은 반려인들이 자신보다 짧은 수명을 살다가는 동물의 마지막을 지키는데 상상 이상의 자원을 투입하며 기쁨과 절망의 시간을 보낸다. 나 역시 그랬다.


아픈 동물을 돌보는 것은 숭고한 행위다.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를 돌본다. 반려동물을 각별하게 사랑하는 이들이 ‘자식 같은 아이다’, ‘자식처럼 기른다’ 말하는데 이 아이들은 장성해 반려인의 노후를 책임져 줄 것도 아니다. 한 존재를 위해, 삶에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조건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란 존재의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 고양이는 나를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조금 더 성숙한 인간, 아름다운 인간이 되는 길을 열어줬다.


아이를 돌보면서, 극한의 피로와 두려움 속에 드문드문 고요한 충만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회오리치던 그 이상하리만치 행복했던 감정들을 잊을 수 없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우주적인 감사함과 행복감, 그저 존재하고 있음에 대한 긍정, 그야말로 처음 느껴보는 구원의 감각이었다.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작은 고양이를 돕는 것이, 오히려 나를 구원하고 있다는 느낌. 그것이 돌봄의 부산물이었음을 아이가 떠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 아서 클라인만이 말하듯 돌봄의 핵심이 우리 안의 현존(presence)을 끌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 아이에게 다가가야 했고, 아이 또한 완전한 존재로 나의 돌봄을 받아들이던 날들이 나를 구원했다.


꺼져가는 불빛이라고 어두운 것은 아니다. 가장 맑은 눈동자로 깊은숨을 몰아쉬며 나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한 생명체와의 교감은 그 어떤 불빛보다 밝고 환했다. 존재의 가장 깊은 층위를 나누는 것. 아이의 욕구가 나의 것이 되고, 나는 이 작은 고양이가 되는 경험.


내 고양이를 깊이 사랑한 것, 몸과 마음을 다해 한 존재를 돌본 경험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약한 생명들을 향해 마음의 창을 내도록 했고,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을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수용은 포기가 아니다. 다음 단계로 씩씩하게 나아가는 것이었다. 나의 위대한 작은 고양이가 선물한 온전히 사랑하는 것의 기쁨과 고통의 시간들, 나는 여전히 그 언저리를 헤매고 있다.


*주1 : 아서 클라인만 <케어 : 의사에서 보호자로, 치매 간병 10년의 기록> p187. 시공사, 2020

*주2 : 미미 사후에 알게 된, 임사체험 보고나 관련 책들을 보면 체험자들이 공통적으로 ‘조건 없는 사랑(unconditional love)’을 증언한다. 종교(기독교 등)에 따라 신의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는 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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