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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우주 Sep 21. 2022

아이가 떠나고 : 시간이 걸리는 일

[34] Ⅲ.책임에 대하여 : 동물을 키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①

자, 이제 파도를 마주할 시간이다. 상실감이라는 사납고 거대한 파도. 흔히 펫로스 증후군이라 부르는 사별의 고통이 당신을 덮치고 할퀸다. 아이의 소풍길을 배웅하며 몸도 마음도 축난 보호자는 출구가 아니라 다시 입구에 선다. 고양이별로 떠난 내 아이를 기억의 이승에 영영 붙들고자 하는 연옥 같은 나날이 시작되는 것이다.


반려동물과 사는 이들에게 동물은 사람 가족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가족이다. 솔직하자면, 사람 가족보다 실은 더 순도 높은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가 많다. 모든 인간관계는 애정의 깊이만큼 서운함, 미움도 자라는데 반려동물에겐 그런 게 없다. 동물에겐 이해관계가 없고 기대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순수하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대체 불가능한 존재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외모가 어떤지, 사회적 위치가 어디쯤인지 무엇도 계산하지 않고 나를 대하는 존재는 너뿐이니까.


아이 말년에나 절감한 것은 젊은 내가 이를 악물고 사는 동안 이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가 변함없이 내 옆에 있어줬다는 사실이다. 삶은 고단하고 세상은 악의로 가득하다.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밥벌이 전선에서 나는 고슴도치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살아왔다. 직업과 사는 곳이 바뀌고 때론 가족이 바뀌고 하는 동안, 이 따뜻하고 과묵한 생명체만이 언제나 조용히 내 곁을 지켰다. 무정한 세상을 헤매다 나의 작은 공간으로 돌아와 보드라운 털덩어리를 마주할 때 느낀 해방과 구원.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는 감정과 생각을 털어놓고 마음껏 속마음을 말했던 무수한 시간들.


일상적으로 예찬할 대상이 있는 삶은 얼마나 행운인가. 가난한 마음으로 살던 내게 늘 웃음과 사랑을 준 변치 않는 존재, 우아한 몸짓에 도도함을 뽐내지만 알고 보면 허당인 내 작은 털북숭이 친구. 하지만 사라지는 몸을 가진 존재로서 나보다 빨리 생의 숙제를 마치고 고양이별로 돌아간 내 사랑.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미미라 부른다. 취미 모임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닉네임, 메신저 대화명 같은 것들도 온통 미미라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나를 미미라 부르는 게 무척 자연스러웠고 여전히 그렇다.


아름다운 사랑 영화이자 성장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을 보면서 나는 자랑스러웠다. 사랑의 징표로 주인공들이 서로의 이름을 나누는 모습에 미미를 떠올릴 만큼, 내 사랑은 애틋하면서 일견 우스꽝스럽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도 나는 미미로 호명될 때마다 행복감을 느낀다. 아주 일상적인 호칭에서 아이와 일체감을 느낄 수 있어서다.

 

애착의 크기만큼 슬픔은 크고 강렬하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고 감정에 북 바쳐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많을 것이다. 이때 마음껏 슬퍼하라고들 한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슬픈 감정을 억누르면 당장은 괜찮아도 나중에 큰 마음의 병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비 반려인은 결코 알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해를 요구했다가 도리어 상처를 받게 된다. 슬픔을 안전하게 드러낼 대상과 공간을 마련해두는 것이 좋다. 심리치료나 전문 상담 프로그램도 다양해지고 있다.


내가 했던 일 

아이와의 추억을 잘 매만지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미미를 보낸 직후 한 집사님의 재능기부로 열린 내고양이 그리기 수업에 운 좋게 참여했는데 큰 위로를 받았다. 한 올 한 올 아이의 털을 손으로 그리면서 아이를 정말로 쓰다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난생처음 타투도 했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 방식으로 아이를 내 몸에 새기고 싶었다. 시술이 아프다고 해서 긴장했는데 별로 안 아파서 오히려 눈물이 났다. 너를 잃은 것에 비하면 이런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호기심 가득한 얼굴은 팔뚝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늘 내 뒤를 봐주는 느낌이라 든든하다. 내가 지나는 걸음걸음을 아이가 본다는 생각이 들어 더 잘 살아야지 다짐하게 된다.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몸을 돌본 것도 일상 복귀에 도움이 됐다. 아이를 돌본 기간 빠진 살과 근육을 채워 넣으며 아이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근력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사찰, 성당, 교회 등을 가보는 것도 좋다. 조계사는 반려동물을 위한 천도재를 매년 열고, 몇몇 성당에선 반려동물 장례미사도 해준다. 나는 부처님이 오신 날 가까운 절에 가서 아이 이름을 적어 연등을 단다. 많은 이들의 염원이 오색 깃발로 나부끼는 풍경이 제법 위로가 된다. 나만 슬픈 것이 아니구나, 많은 이들이 힘든 숙제로 괴로워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담담해진다. 


나의 상실을 존중하지 않는 이들과는 거리를 두자. 특히 '그깟 고양이' 같은 말은 한귀로 흘려야 한다. 그런 막말엔 상처를 받을 게 아니라 발화자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 삶이 우리에게 허락한 엄청난 행복, 동물이 주는 사랑을 모르고 평생 살아갈 멍청이일 뿐이다. 또한 인생에서 정말 큰일을 겪고 나면 내가 살면서 뿌린 씨앗의 작황을 단박에 알 수 있게 된다. 아이의 죽음 이후 나는 잘못 자라난 싹을 솎아내듯 인간관계를 많이 정돈했다. 


그 흉폭한 시간을 견디며 별것 아닌 많은 일을 했는데 하나만 꼽으라면 죽음 자체를 공부한 것이 가장 도움이 됐다. 나는 미미 덕분에 죽음을 탐구하며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영적 존재이고, 존재의 핵심은 영성(spirituality)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또한 보이는 물질세계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삶의 태도도 바뀌었다. 그렇다고 상실의 고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좋은 곳에서 정말 잘 지내고 있을 것이란 확신이 크게 위안이 된다. 종교적이지 않지만 영적인 삶(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을 살려 노력하고, 일상이 버거울 때는 내가 언젠가 죽을 것이란 사실을 떠올린다(Memento mori). 그러면 대개는 어느 정도 괜찮아진다.

2019년 탐구를 시작할 즈음 빌려 읽은, 내가 이런 책을 다 읽는구나 싶어 찍어둔 사진들이 남아있다. 이후 본격적으로 죽음 관련 책을 사들여 지금은 내 책장을 잔뜩 채우고 있다

죽음과 삶의 의미를 탐구하면서 마침내 다른 고양이를 들일 준비도 된 것 같다. 내 일상을 따뜻함으로 가득 채우는 고양이가 없는 삶이 너무 아까웠지만, 나보다 빨리 삶을 마감할 존재와 행복한 대가로 다시 극도의 심리적 고통을 받는 것은 상상조차 싫었다. 사랑하던 동물을 떠나보내고 두 번 다시 동물을 키우지 않겠단 사람들도 이해가 됐다. 


이제 내 소중한 고양이가 좋은 곳에서 잘 지내고 있고, 내가 이번 삶을 마치면 가장 먼저 배웅할 것이며, 그렇게 분명 만나 서로 얼싸안을 것이란 믿음, 아니 예정된 사실이 나를 진심으로 위로한다. 미미가 가는 길은 내가 배웅했지만, 내가 떠나는 길은 분명 미미가 배웅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스노우캣의 그림처럼 우리는 정말로 서로의 생각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려동물을 비롯해 소중한 이들과 사별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많다. 죽음, 근사체험, 환생, 사후세계, 신비가들의 주장 등 나 역시 전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치부할 이야기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 새로운 인식을 가지면 좋겠다. 큰 위로가 되는 것은 물론 삶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죽음에 대해 알기 전 나는 앞으로만 곧장 내달리도록 옆을 볼 수 없는 가리개를 쓴 경주마로 살았다면, 이제 가림막을 훌훌 떼고 더 넓은 세계, 입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세상을 맛보며 마음껏 뛰노는 행복한 당나귀가 된 기분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를 잃은 모든 이들에게 부디 조금은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상실감의 파도를 잘 넘고 다시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에 안착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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