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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Kids Oct 15. 2023

장국영, 그가 연기한 악(惡)의 형태

영화 <창왕: 스피드 4초> (Double Tap, 鎗王, 2000)

1. 잠들었던 악을 깨우다

 사격을 배우기 위해 팽아력(장국영 분)을 찾아온 양 사장이 생닭을 표적으로 삼아 총알을 박아넣을 때 아력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움찔거리는 몸은 숨기지 못한다. 제 손으로 사격하지도 않았으면서 종이로 만들어진 과녁이 아니라 동물의 근육에 총알이 박히는 모양과 더불어 이리저리 살점이 튀기는 선뜩함에 아력은 순간 매료된 듯 보이기도 한다. 살아 움직이는 닭을 타겟삼아 연습하고 싶어하는 사장에게 아력은 총은 죽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의 마음 속 깊은 곳 어딘가 심장이 박동하고 숨쉬는, 살아있는 타겟에 대한 갈망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는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동의해야 하는 도덕과 윤리를 족쇄처럼 지고 내면의 폭력성을 감춘 채, 은밀하고도 잔인한 욕구를 애써 외면한다. 금 간 댐이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영원히 가둘 수 없듯, 그의 본성은 결국 사격 대회에서 난데없이 나타나 아수라장을 만든 총기 난사범을 망설임 없이 사격하여 즉사시키는 순간 물꼬를 튼다.  


 사격 대회 이후, 아력은 살인에 희열을 느끼고 범죄를 일삼기 시작한다. 살인사건을 수사하던 중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경찰이 아력을 찾아가 추궁하지만, 아력의 연인인 콜린(황탁령 분)의 거짓된 진술과 불충분한 증거로 풀려나게 된다. 물증은 없지만 확실한 심증은 있었던 경찰은 콜린을 억지로 구금하고 아력을 도발한다. 이후 아력은 분노하여 콜린을 가둬두고 자신을 추격하는 경찰 무리를 사격장으로 유인해 몰아넣은 뒤,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한 사격으로 그들을 전부 몰살한다.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는 아력은 망설임 없이 주요한 경찰 인력을 차례로 제거하며 꾸준히 그와 대립했던 경관인 묘지순(방중신 분)을 자극한다. 아력은 콜린을 구하기 위해 묘지순을 인적이 많은 곳로 불러내고, 둘은 서로에게 총을 난사하는 것으로 마지막 결전을 치룬다. 묘지순은 가까스로 생존하지만, 아력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2. 양면의 악, 그리고 장국영


 <창왕: 스피드 4초>는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라 말하긴 어렵다. 아력이 폭력성을 깨달은 이후의 행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어 전개가 부자연스럽고, 부족한 개연성이 곳곳에서 보이는 데다 인물들의 심리를 이해하기 어려워 우리는 어리둥절한 채로 진행을 좇아가게 된다. 이에 더불어 경찰과 아력 간의 대립 구도, 아력과 콜린의 관계 등 아력을 둘러싼 갈등 구조의 임팩트가 부족해 긴장감이 떨어짐에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 많은 작품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결점은 장국영의 연기 하나로 상쇄된다. 그의 살인마 연기는 그간 주로 선역을 맡던 장국영이 보여준 연기와는 완전히 다른 신선함을 주고, 애매한 분위기의 중심추가 되어 전반적인 흐름을 가져간다. 

 아력이 거울을 보며 총 쏘는 시늉을 하는 장면에서, 아력은 상상 속 누군가에게 총을 겨누며 상황극을 펼치고 인간에게 총구를 겨눠 협박하는 것으로 당장에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는 공포감을 안기는데 상당한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것도 잠시, 이내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고 그는 자신이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깨달으며 고통 속에 몸부림치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총알을 박아넣어 죽이는 쾌감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죄책감 또한 느끼는 아력의 모습으로 관객은 그가 단순히 살인에 대한 맹목적인 일념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상당한 혼란 상태 속 불안정한 정신을 가진 인물임을 알게 된다.


 묘지순과의 마지막 결전 이후, 아력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를 회상한다.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는 자신과 공포에 떨며 흐느끼는 콜린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고, 허름한 방 안에 앉아있는 자기 뒤통수에 총을 겨누는 콜린 덕분에 드디어 죄를 벗어낼 수 있다는 해방에 대한 기대로 미소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콜린이 총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태연히 죽음을 기다리는 아력의 모습을 통해 그가 아예 감정과 동정이 없는 인물이 아니고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일하게 콜린만큼은 아꼈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인을 일삼는 무감한 인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인물의 심리도 모호하고 개연성도 떨어지는 작품이지만, 장국영이 연기한 아력의 양면적인 심리 상태로 상당한 설득력을 얻으며 그의 연기 하나로 매력적인 작품으로 탈바꿈된다.


 아력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들은 여타 연쇄 살인범을 좇는 경찰 수사물과 다를 바가 없고, 일반적인 수사물보다도 특색이 없어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장국영이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작품은 활기를 띠며, 우리는 작품이 그의 연기로 좌우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살인에 쾌감을 느끼지만 가슴 한 구석에 있는 죄책감으로 정신적 불안과 혼란을 겪는 아력의 양면적 심리 상태가 장국영의 연기 덕분에 표면으로 올라와 스크린에 보여지고, 장국영은 어물쩍 전개되던 비논리적 서사와 인물 심리 묘사에 한 줄기 개연성이 되어준다. 이해되지 않던 팽아력이란 인물의 심리와 행적은 장국영 연기로 힘을 갖게 되고, 작품은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사이코패스 덕분에 흥미로워진다. 



Written by 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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