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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Kids Dec 22. 2021

끊어진 과거를 미래에도 그리워하려면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 1994)

 90년생이 90년대를 소비하는 시대다. 겪지 못했어도, 겪지 못한 만큼 그때를 떠올려본다. 동시에 90년대를 관통하는 풍요롭고 활기찬, 다양한 색깔을 가진 홍콩을 찾을 수 없는 지금이기도 하다. <중경삼림>은 1997년 반환을 앞두고 홍콩인들이 가장 불안해할 시기에 개봉했다. 그리고 그 불안은 이후 거대하게 증폭해 공포와 두려움으로 변환되고 있다. 과거를 끊임없이 추억하고 그것을 여러 방식으로 소비하려는 사람들은 점점 늘고 있지만 정작 현재와 이어지지 않는 시간이다. 끊어진 과거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어내고 무엇을 반추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중경삼림>은 다양한 것을 불분명하고 애매하게 정의한다. 캐릭터의 정체성이나 관계, 감정, 공간, 장르 같은 것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모호한 것을 굳이 명확하게 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인물의 이름을 모른다. 경찰 223이 왜 무엇인가를 먹음으로써 감정을 해소하는지 알 수 없다. 페이가 왜 경찰 663을 청소라는 방식을 택해 애정을 표현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이러한 모호함은 관객과의 의도적인 불통, 거리 두기로도 정의될 수 있다. 캐릭터 사이의 깊은 대화에 주목하기보다 독백만 늘어놓음으로써 관객의 시야를 한 인물의 주관에 가둔다. 하지만 오히려 그 지점이 관객이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가 된다. 관객은 무질서성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감각적인 매혹으로 다가오는 몽환의 판타지를 즐긴다. 앞서 말한 적당한 거리는 고유성을 흐릿하게 하고 등장인물의 경험을 관객의 보편적인 삶에 적용하도록 이끈다. 어쩌면 관객이 직접 그것들을 유추하고 다양한 해석의 레이어가 켜켜이 쌓여가며 영화가 풍요로워지는 것은 왕가위가 의도하고자 한 바일지도 모르겠다.

 


왕가위가 그려내는 인물은 대체로 공허하고 불안하다. 그리고 결국 부유한다. 하지만 그것이 배드엔딩을 의미하는 것인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헤어졌고 엘로이즈는 원치 않는 결혼을 하면서 끝을 맺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배드 엔딩이라고 결론 짓지 않는다. 초상화 속 28p를 통해 끝까지 교감했고 관현악단의 연주를 함께 들으며 끝까지 사랑했으니까. <중경삼림>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쌍방향의 사랑을 이뤄내지는 못했지만 아무도 결말이 나쁘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 과거에서 벗어나 다른 미래를 기대하게 됐기 때문이다. 더 불행해지지도 않았고 오히려 행복해졌다고 보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방황하고 불안한 캐릭터. 엇갈리고 후회스러운 사랑. 우울하고 외로운 청춘. 시대가 달라도 감정은 여전하다. 박제된 시간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20년 전 그들에 공감한다. 겪지 못했어도 마음을 다해 그때를 추억해본다.



한 편의 영화에 대한 감상이 거대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통일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관객은 한 가지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지 않고 자신의 입맛대로 영화를 관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많은 감상 속에서도 공통된 씁쓸함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왕가위의 <중경삼림>보다 <우산 혁명: 소년 vs. 제국>을 먼저 감상한 Z세대로서 마냥 그때의 홍콩을 순진하게 그리움의 대상으로만 소비하는 것에 이상한 죄책감을 느낀다. 자국의 자유를 위해 저항하는 조슈아 웡이 있는 홍콩에서 매혹적이고 아릿한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는데, 사라진 과거를 애처로이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맞을까 싶기도 하다. <중경삼림>이 그려내던 홍콩은 없어졌다. 증폭된 불안 속에서 두려움과 공포만이 홍콩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직접 겪지 못해 더 그리워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직접 겪지 못해 무서운 디스토피아의 도래도 생각해보아야 할 시점이다. 그리운 과거를 미래에도 그리워하기 위해선 현재도 바라보려는 노력과 책임감이 필요해 보인다.



Written by 나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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