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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마비루 Dec 17. 2024

러브레터의 나카야마 미호, 엄청났던 전성기에 대해

80년대 아이돌 산업의 정점에서, 엄청났던 나카야마 미호의 그 시절 

유년시절의 나카야마 미호 


나카야마 미호는 1970년 3월 1일 일본 나가노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 아버지는 이름조차 기억에 안남을 정도로 희미한 존재였고,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단촐한 생활을 했는데요. 

어렸을 때는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해 친구도 별로 없었죠. 그런 나카야마 미호의 꿈은 가수.  유치원때 TV에 나온 캔디즈의 발랄한 모습은 자신의 처지와는 정반대였고, 그들의 모습에 매료돼 가수가 되고 싶다고 꿈꾸게 됩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히 놀러간 하라주쿠에서 스카우트되며 연예계에 데뷔하게 됩니다. 왕눈이 같은 큰 눈에 조막만한 얼굴로 데뷔 초 그녀는 이국적인 외모로  강렬하게 각인되었는데요. 


데뷔와 함께 여러 광고 모델에 나오게 되었고, 15살이 되던 시절 드라마 “매번 떠들썩하게 합니다”에 출연하면서 배우로도 영역을 넓혔고, 같은해  'C'로 가수 데뷔를 완수했는데요. 이 곡이 그녀가 출연한 드라마 '여름·체험 이야기'의 주제가로 사용되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 덕분에 같은 해에 '일본 레코드 대상' 최우수 신인상을 받으면서..주목받은 나카야마 미호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비밥 하이 스쿨, 1986년 드라마 生意気盛り(한창 건방질 때)를 대히트 시킵니다. 이 드라마에서도 직접 주제가를 불렀는데( 'wakuwakuさせて) 이 곡 마저도 큰 인기를 끌었죠. 말그대로 나카야마 미호의 시대가 성큼 다가온 듯 했는데요. 


비밥 하이스쿨_나카야마 미호 

80년대 일본의 아이돌붐 그 정점에 있었던 그녀 


80년대에 일본에는 아이돌 열풍이 불었어요. 2000년대 일본을 장악했던 이런, 이런 아이돌들이 아닌 쇼와 아이돌들이 대거 나왔거든요. 당시 아이돌 산업과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번창하면서 수많은 신인들이 쏟아졌고 아이돌 붐이 사회적인 현상으로 일어납니다. 


80년대 후반에도 아이돌 풍년이 이어지며, 무려 ‘아이돌 4대 천황’이란 말까지 나왔는데, 바로 아사카 유이, 미나미노 요코, 쿠도 시즈카 그리고 나카야마 미호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여기서 쿠도 시즈카는(지금은 키무라 타쿠야의 부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80년대를 휩쓴 아이돌이었는데 여리여리한 얼굴로 무수히 많은 남자들을 매료했습니다. 근데, 쿠도의 절친이 바로 나카야마 미호였죠. 

요즘도 절친 아이돌, 그 자체가 화제가 되면서 같이 모습이 주목받고는 하잖아요. 이 둘도 그랬는데 87년에 나카야마 미호가 나온 드라마에 쿠도 시즈카가 조연으로 출연하며 부쩍 가까워졌고, 미포링, 시짱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자매처럼 지냈습니다. 

쿠도 시즈카오 나카야마 미호 

하지만 이 사이도 오래 못갔는데요… 새삼스럽지 않게도(?) 이유는 이 남자(ㅎㅎ)

타하라와 미포링 

쟈니스의 인기 아이돌 타하라 토시히코를 두고 삼각관계가 형성되면서 부터였죠. 타하라 토시히코와 나카야마 미호는 탑 아이돌 커플로, 서로 공개 연애를 하는 사이였습니다. 


미포링과 시짱은 각별한 사이였지만 1991년 초 한 방송에서 쿠도 시즈카와 타하라 토시히코의 과도한 키스신이 방송되면서, 나카야마 미호는 화가 대폭발..!! 이외에도 한 방송에 둘이 손을 잡고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소문으로는)왜 손을 잡냐고 격노하자 쿠도 시즈카는 “그 쪽에서 손을 잡으니 어쩔수 없잖아" 라고 전했다는 말이 돌면서 흥미진진한 뒷얘기에 대중들의 관심이 집중됐죠. 타하라 토시히코라는 이름이 낯선 분들이 계실수도 있는데, 당시 쟈니스에서 아끼는 아이돌이 둘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타하라와 콘도 마사히코. 


둘은 쟈니스의 톱 아이돌로 당시에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콘도의 경우 요즘은 한국 방송에서 자신의 히트곡 긴기라기니를 부르는 중년이 되어버렸지만, 쟈니스 역사상 처음으로 밀리언셀러를 달성하며 쟈니스의 구원투수로 불리기도 했는데요.

나카모리 아키나의 연인으로도 알려진 콘도 마사히코

그 인기가 어느정도였냐면, 우리나라는 문화개방전이라 일본 가요 청취가 금지되었는데도, 부산 등지의 롤러장에선 긴기라기니란 노래가 암암리에 전파되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 콘도의 여자친구가 나카모리 아키나였죠.

콘도 마사히코 

아이돌. 경제력이 무한 상승하던 쇼와 시대의 황금기,  나카야마 미호는 이 아이돌 세계의 중심에서 삼각관계의 주인공이 되기도,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기도 할 정도의 파급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아이돌로서 미포링 

미포링은 가창력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지만 히트곡을 쏟아내면서 아이돌로 입지를 다졌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곡은 바로 이 곡. 밴드  WANDS와 함께 부른  세상 누구보다도 분명 '世界中の誰よりきっと이란 곡입니다. (한소절 들어보셔유..4:52초)


(우리나라의 포지션의 그 해 겨울은이나 더넛츠의 사랑의 바보란 곡으로 리메이크 됨)


무려, 180만장이나 팔리며, 오리콘 차트 1위의 영광을 차지합니다. 나카야마 미호는 당시 총 음반 판매량 약 1700만장을 기록합니다. 이 기록이 어느정도냐면...꾀꼬리 같은 마츠다 세이코와 카리스마 있는 비브라토를 선보이는 나카모리 아키나를 뒤이은 기록이었죠. 


탄탄대로. 뻥뚫린 고속도로 처럼 나카야마 미호는 80년대와 90년대 까지도 가수와 배우로서 큰 인기를 끕니다.  황금시간대인 게츠쿠 드라마 주연만 7번이나 출연하면서 전성기를 기록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러브레터를 계기로 인지도를 올렸는데요. 


러브레터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에서 1인 2역을 연기하면서 홋카이도 오타루의 설원에서의 오겡끼데스까라고 외치는 명장면을 남겼는데요. 이 영화는 막상 개봉 당시에는 관객수로는 큰 흥행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작품성을 인정받아 여러 상을 수상했고, 한국에서는 8차례나 재개봉됩니다.(2025년 1월에도 국내 개봉 30주년을 기념해 재개봉을 예정하고 있죠.. ㅠㅠ)



이렇게 배우로 인지도를 높였지만 본인은 여배우 인생을 돌아봤을 때, 별로 칭찬 받은적이 없었다며 자신을 낮추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촬영하는 내내 감독님께 꾸중을 들었는데, ‘그래도 거짓말은 하지 않네’ 이렇게 툭 던진 말에 감동받아, 크게 기뻐했다고 하는데, 어렸을 때도 어머니로부터 줄곧 “너는 거짓말을 안하는 착한 아이구나”라는 말을 들어 깜짝 놀랐다고 하죠. 


연예인으로서는 드물게 외모나 패션에도 무관심했고 혼자 외출할 때는 버스를 이용하는 소탈한 성격이었습니다. 


로망이었던 결혼 

아이돌과 배우로서 탑을 찍었지만, 서른을 앞두고는 가족이 많은 멋진 할머니가 되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을만큼 어렸을 때부터 결혼에 대한 열망은 강했습니다. 


츠지 히토나리. 

에쿠니 가오리와의 합작 소설인 냉정과 열정 사이,  또 사랑후에 오는것들의 저자로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진 이 분과 첫눈에 반해 8개월만에 결혼을 결정합니다. 첫 만남에 츠지가 나카야마 미호에게  '드디어 만났네'라고 말했다고 하죠.

츠지 히토나리

(당시 츠지는 이미 배우랑 한번 결혼한 전력이 있는 돌싱남)


결혼과 함께 나카야마 미호는 연예계를 등지고 파리로 떠났고,  2004년에는 첫 아들을 출산합니다. 파리 생활은 베일에 쌓였지만, 약 10년 뒤 둘의 파국설이 들려옵니다. 쐐기를 박은것은 츠지의 블로그 글이었습니다. 그는 블로그에“오늘 이혼 신고서에 싸인을 했다"  앞으로 아들과 함께 둘이서 살아가게 된다며 이혼고백과 친권을 자신이 갖는다는 것을 알렸는데요. 


심지어, 이혼 협의중인 기간에 나카야마는 유명 뮤지션인 시부야 케이이치로와 교제가 발각되며, 남자에게 미쳐 아들도 버리고 이혼한 매정한 여자로 낙인이 찍히며 비난에 직면합니다. 

파파라치가 찍혀버려서 ..

자유분방. 연애체질. 매스컴은 그녀를 그렇게 정의했지만, 이혼후 항상 아들을 그리워했다는 지인들의 인터뷰가 있는데요. 한 인터뷰에 따르면, 이혼의 조건이 친권을 넘겨주는 것이었고, 그 이후 친권을 넘긴것에 대한 후회로 괴로워하다 지인들에게 한밤중에 울며 전화를 하는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


또, 한켠에서는 전남편의 중성화 선언에 나카야마 미호가 이혼을 결심할 수 밖에 없었다는 말도 나왔는데요.

2009년 쯤에 남편은 “시대는 절대 중성이에요. 멋진 할아버지를 목표로합니다"라며 긴 생머리로 변신한 비주얼을 선보였는데, 이후에도 멋진 미중년이 되고싶다며, 제모도하고 에스테틱에도 한달에 몇 백씩 투자한다는 얘기가 나왔죠.


꾸준히 콘서트 활동을 하고, 자신의 밴드 뮤지션인 9세 연하남과의 교제설도 터지는 등.

50대의 중반을 맞이해 공사 모두 순조롭게 달려가고 있었는데요. 


갑작스러운 사망소식 


데뷔 40주년 콘서트, 러브레터 개봉 30주년(우리나라) 등 2025년에도 굵직 굵직한 이벤트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24년 12월 6일 도쿄 시부야구 내에 있는 자택의 욕조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됩니다. 이날은 오사카에서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수사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자택 현관은 잠겨 있었고 눈에 띄는 외상은 없는 채 욕조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유서 등도 발견되지 않아 부검이 실시됐고, 부검 결과 사건 관련성은 없었으며, 사인은 입욕 중 일어난 불의의 사고로 판명되었습니다. 

일본 경시청은 “불의의 사고라는 결론만 있을 뿐 히트 쇼크나 음주 등의 요인은 부검에서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올해 여름 39주년 투어를 맞이해, 내년이면 40주년이니까 성대하게. 다들 와주겠지!라는 말을 남길만큼 밝고 희망찼던 그녀였기 때문에 주변사람들은 허탈감이 컸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추억을 남겨주고 간 나카야마 미호.

그렇기에 그녀가 더 오래 기억에 남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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