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G 이론: 욕구는 직선이 아니라 계속 순환한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는 인간 이해에 강력한 프레임을 제공했지만, 실제 삶과 조직에서는 욕구가 그렇게 단정적이지 않다. 사람의 욕구는 단계적으로만 올라가지 않고, 상황에 따라 내려가기도 하고, 여러 단계가 동시에 작동하기도 한다. 이 현실을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이론이 바로 ERG 이론이다. 욕구를 존재 욕구(Existence), 관계 욕구(Relatedness), 성장 욕구(Growth)라는 세 갈래로 단순화하고, 이 욕구들이 위아래로 순환한다고 설명한다.
이 이론의 핵심은 인간의 욕구가 ‘불완전한 성장’과 ‘반복적인 충족’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즉, 사람은 어느 한 욕구만 채워지면 되는 존재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여러 욕구를 오가며 살아가는 존재다. 실제 조직에서 사람의 행동이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는, 욕구가 일정한 단계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 욕구는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욕구로, 생리적 안정과 안전감이 모두 포함된다. 이 욕구가 흔들리면 다른 욕구는 즉시 후순위로 밀려난다. 예를 들어 너무 피곤하거나 건강이 무너지면 아무리 의미 있는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직장에서 불확실한 고용 조건, 갑작스러운 조직개편, 지나친 업무량처럼 기본적인 존속 조건이 흔들릴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변화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의지 부족이나 게으름이 아니라 존재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상황일 수 있다. 기본의 무너짐은 동기의 가장 큰 적이다. 존재 욕구가 회복된 순간, 사람은 다시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되찾는다.
관계 욕구는 타인과 연결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팀의 분위기, 상사와의 신뢰, 동료와의 교류 같은 요소가 여기에 해당한다. 사람은 소속감이 전혀 없는 팀에서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하기 어렵다. 반대로 환영받고 지지받는 환경에서는 도전하기 쉬워지고 회복도 빨라진다.
실제로 성과가 뛰어난 팀은 업무 능력 이전에 관계 욕구가 충족된 경우가 많다. 누군가에게 나의 존재가 보이고, 나의 기여가 의미 있게 받아들여진다고 느끼면 행동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관계 욕구는 동기를 촉진하는 심리적 연료다.
성장 욕구는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발전하고 싶은 욕구다. 배우고, 도전하고, 새로운 역할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여기에 속한다. 이 욕구가 충족될 때 사람은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역량을 확장한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성장 욕구는 존재·관계 욕구가 일정 부분 충족될 때 활발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업무와 인간관계가 안정되어 있을 때 누군가는 더 큰 프로젝트를 맡고 싶어 지지만, 반대로 기본적인 안전감이 흔들릴 때는 아무리 좋은 성장 기회가 있어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성장 욕구는 부드럽고 민감한 욕구이기 때문에 환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ERG 이론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좌절-퇴행 메커니즘이다. 위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래 욕구로 내려가서 만족을 찾으려 한다. 예를 들어 성장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관계 욕구를 더 적극적으로 충족시키려 하고, 관계가 흔들리면 다시 존재 욕구에 집중하게 된다.
실제 조직에서는 이런 흐름이 자주 관찰된다. 예를 들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고 싶어 했던 직원이 갑자기 적극성을 잃는 경우가 있다. 많은 리더가 이를 의지 부족으로 판단하지만, 실제로는 관계적 갈등이나 안전감의 저하가 원인일 때가 많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앞으로 가는 것’보다 ‘안정적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이는 심리적으로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리더십의 본질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다. 그러나 사람은 의지나 지시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존재 욕구가 흔들린 사람에게 성장 기회를 던져봐야 아무 반응이 없고, 관계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구성원에게 업무 위임만 늘리면 부담으로 느껴질 뿐이다.
사람이 왜 움직이지 않을까 고민할 때 ‘지금 이 사람이 어떤 욕구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답이 달라진다. 존재 욕구가 부족하면 안정과 구조를, 관계 욕구가 부족하면 소통과 지지를, 성장 욕구가 부족하면 도전과 자율을 부여해야 한다. 욕구를 잘 읽는 사람은 구성원을 ‘관리’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하고 싶다는 욕구를 갖지만, 현실에서는 수시로 낮은 욕구 단계로 내려간다. 지쳐 있거나 관계가 불안정하거나 업무가 과도하게 몰릴 때 동기는 자연스럽게 존재 욕구를 향해 후퇴한다. 이 과정을 이해하면 ‘왜 나는 갑자기 의욕이 떨어졌을까?’라는 질문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바뀐다.
자신의 욕구 흐름을 알고 나면 동기를 회복하는 방법도 달라진다. 성장 욕구가 살아나지 않을 때 억지로 목표를 더 크게 만드는 대신, 충분한 휴식이나 안전한 환경을 먼저 확보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욕구가 채워져야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욕구는 선형이 아니라 순환한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 타인을 이끄는 일도, 스스로를 움직이는 일도 훨씬 부드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