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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률 Oct 27. 2024

비상금 주머니 차기

일 외의 여러 활동에 에너지를 쓰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에너지가 충전됐다. 일에 대한 부담이나 책임 없이 오로지 재미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예를 들어, 베이킹을 하다가 실수로 설탕을 더 넣으면, 그저 더 달게 먹으면 된다. 뜨개질을 하다가 코를 잘못 셌으면 풀고 다시 뜨면 그만이다. 중간에 그만두어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회사에서는 해가 지날수록 직책이 무거워지고, 적응할 틈도 없이 일이 몰려왔다. 반면, 취미 활동은 내가 원할 때 언제든 멈출 수 있었다. 입문만 해도 좋고, 초보 수준에 머물러도 괜찮았다. 부정적으로 보면 도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도피가 내게는 일종의 비상금처럼 든든하게 느껴졌다. 회사 밖에서도 마음 둘 곳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정시켰다.




그동안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회사에서 해야 할 일만 하다 보니 무기력하고 짜증 가득한 내 모습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면서, 나에게도 잘하고 싶어 하고 내일을 기대하는 모습이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헬스장에 자주 출석해서 선생님께 칭찬받고 싶고, 어떤 글을 써볼지 고민하는 나를 보며 평생 무기력하게 살진 않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회사 밖에서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니, 그 에너지를 회사에서도 가져와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일할 수 있었다. 일이 갑자기 좋아지진 않았지만, 예전처럼 우울하게 일하기보다는 조금 더 가볍게 처리할 수 있었다. 만약 승진을 목표로 했다면 그것도 좋았겠지만, 커리어에 열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오래도록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을 찾아 새로운 커리어로 발전시킨다면 더 의미 있을지도 모른다.


앞서 얘기했던 나의 시도 1과 2는 약 5년에 걸쳐 일어났다. 시간이 약이 되어 번아웃이 회복된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시도한 방법들이 효과를 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더 잘 지낼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감이 쌓인 것만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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