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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man in Gangneung

by pathemata mathemata

어느 무더운 날이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찾아간 강릉의 시외버스터미널은 놀랍게도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았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이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지만 천정 위에 선풍기들만 열심히 고개를 휘저어 방문객들의 무더위를 식혀주려 애쓰고 있었다. 결국 아내와 더위를 피하기 위해 터미널 안에 입점한 유명한 M사의 저가 커피전문점에 들렀다.


키오스크를 이용해 주문하는데 벽안(푸른 눈)의 살집 좋은 노인이 기기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주문하기를 기다렸다가 주문을 마치고 돌아서려는 내게 한 마디를 던졌다. "English?" 문장이 아닌 단어로 내게 이야기를 건넸는데 매우 효율적인 질문인 것 같았다. 얼핏 보니 귀찮기도 하고 기기가 한국어로만 되어 있는 것 같아 나도 짧게, "No"라고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는 실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고 자신의 몸집처럼 커다란 캐리어와 짐이 놓인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다 문득 다시 한번 기기의 초기 화면에 들어가 보니 언어를 선택하는 메뉴가 우측 상단에 있었다. 당연히 그가 찾았던 암호인 English도 존재했다.


나는 초기 설정을 영어로 수정한 후 그에게 주문할 것을 권했다. 그는 역시 짧게 "Thank you."로 답했다. 그러고 나서 아내와 내가 주문한 메뉴가 나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그가 여전히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그런데 그의 뒤에 젊은 남자가 줄을 서기 시작했다.


애써 외면하려고 했는데 아내가 내게 도와주길 채근했다. 나 역시 그 낯선 이방인이 마음에 걸려 다시 키오스크를 향해 갔다. 그는 커피 멤버십 적립 부분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몰라도 이 부분 화면은 한국어였다. 내가 무의미한 적립 단계를 취소시키고 그의 최종 목적인 신용카드 결제 단계까지 진행시켰다.


그는 내게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고 고개를 살짝 꾸벅이며 눈인사를 건넸다. 나는 뭐라고 말할까 생각하다 1초 뒤에 "Have a nice day!"를 외치고 그와 헤어졌다.


곧 손님을 실은 버스가 도착하여 커피를 빠르게 마시고 커피숍을 나섰다. 그런데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아내에게 내가 그를 도와준 이야기를 말하자 아내는 영수증이나 주문 번호를 살펴보았냐고 물었다. 나는 그가 더 이상 도움을 원치 않은 것 같았다고 변명했다. 그래도 입안이 살짝 헌 것처럼 마음에 걸렸다.


아내와 버스에서 내린 손님을 맞이하고 다시 그 커피숍을 지나갈 때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그가 실내에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강릉은 프랜차이즈보다 로컬 커피가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해줄 걸 그랬나 싶었다. 그가 강릉에서 떠나는 길 같았지만 한 번쯤 돌아볼 수 있게 말이다.


https://youtu.be/d27gTrPPAyk?si=PzQfjrakDaNIlh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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