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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빛난다

- 저자 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켈리

허무주의의 시대에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매혹적인 통찰 




책 표지에는 바다 물결이 넘실거리고 하늘에는 십자성별이 빛난다. 큰 망치 머리의 향유고래가 바닷속으로 거대한 몸을 밀어 넣고 있다. 바닷가재의 집게 모양을 한 꼬리는 허공에서 칼춤을 춘다. 

소설 ‘모비 딕’에서 선장 에이해브는 ‘ 주름 잡힌 이마와 높이 솟은 혹, 구멍 뚫린 꼬리를 가졌다고 말했다.

철학자 로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켈리의 공저인 ‘모든 것은 빛난다’ 의 표지에는 모비 딕이 있다. 


그들은 우울과 허무의 시대에서 인간존재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멜빌의 모비딕에서 찾고자 했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단테의 신곡에서 신을 향한 인간정신이 어디에 머물고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공동저자인 숀 켈리의 머리말에 잘 드러나 있다. 


‘지금까지 온 길,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비춰주는 빛나는 그들을 위하여’라는 말에서 이 책은 허무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의미있게 살아가는 그 철학적 방법들을 들려준다.


이론적이거나 학술적인 논리 방식을 버리고 일상적인 사례와 유명 작가와 운동선수를 등장시켜 우리가 살아내어야 하는 절망의 시대를 이야기한다. 특히 서양 고전문학 세 편을 문학 비평가가 아닌 신화적, 철학적, 종교적 입장에서 재해석함으로써 독특한 감상을 제시한다. 

공저자인 휴버트 드레이퍼스(좌)와 숀 도런스 켈리(우)

신의 시대였던 그리스인들의 삶은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들은 삶의 희로애락을  여러 신들에게 의탁함으로써 삶의 고난과 고통을 분산시켜 열정적이고 의미충만한 삶을 살았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전지전능하신 신들이었다. ‘신의 뜻대로’ 라는 주문이 삶의 재미와 낙관성을 가져왔다. 그들의 삶에서 그 어디에도 우울과 권태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신을 옮겨 다니며 자신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 이후 유일신의 등장으로 인간들은 많은 신들을 잃고 어떻게 자신의 삶을 위로 받아야될 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유일신에 의탁한 삶은 빈약했고 허술했다. 새로운 규율이 만들어지고 신의 뜻을 거역하면  반드시 고통과 고난이 뒤따랐다. 오직 신이 가리키는 저 피안의 세계를 꿈꾸며 고통의 삶을 이겨냈다. 


그래도 신이 있는 삶은 견딜만했다. 삶이 위태로울 때 우리는 두 손을 모으고 신을 찬양하며 기도를 올린다.  일용할 양식이 식탁에 오르면 우리는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또 올린다. 삶은 신에 의해 이미 결정돼 있었고 그 예정된 순서대로 인간은 살아가면 되었다. 


하지만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 는 충격적 선언과 함께 신은 더 이성 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지 못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인간이었다. 그 인간이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했다.점점 그 자리는 자본과 기술문명이 대신하기도 했다. 


삶의 결정권을 쥔 인간은 무거운 책임감을 이겨내지 못해 깊은 불안감에 빠졌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삶에 지쳐갔다. 신이 부여한 삶의 의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인간은 그 의미를 새롭게 구성하는데 실패했다. 


신이 없는 세상은 삶의 허무를 불러왔고 사람들은 허무주의자가 되었다. 우울과 권태, 무료와 허무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의미를 잃은 삶의 부표들이 대양을 표류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신이 없는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인간의 자율의지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주어진 운명을 개척하고자 했던 인간 실존의 철학들이 신을 대신해 그 자리를 채웠지만 돌아오는 것은 극단의 허무였다. 도리어 그들은 죄인이 되었다. 그 부분은 단테의 신곡에 잘 드러나 있다. ‘디스의 도시’ 라는 곳은 신의 창조를 거부한 영적인 죄인들을 가둔 곳이다. 


저자는 ‘그들은 사물들에 자기만의 가치를  정립하려하고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신을 부정한 영적 죄인들은 서글픈 허무주의만 가져올 뿐이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다시 다신의 시대로 되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신의 뜻대로 삶이 결정된 중세 기독교 시대로 귀환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저자는 멜빌의 모비딕에 끄집어내고 그의 분신인 이슈메일을 통해 말한다.


‘행복은 지성이나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심장, 침대, 식탁, 안장, 난롯가 그리고 전원 등에 있는 것이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다신주의를 다시 호출하며 삶에서 빛났던 성스러움을 발견하는 것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즉 이슈메일의 말처럼 이 세상 밖에 있는 피안의 세계를 상상하거나 그 어떤 특별하고 심오한 삶의 의미를 찾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다. 


일상 생활 주변에 있는 사물과 사람, 분위기 등에 각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성스러움을 발견하는 관찰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의미생성의 주체로 살아갈 때 삶은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의미생성의 의미는 삶의 창조자이자 예술가로서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네 삶의 예술가가 되어라’ 고 했던 니체의 말도 이런 맥락이다. 


신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던 성스러움을 새롭게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허무주의 시대를 건너는 방법이다. 저자는 퓌시스, 포이에시스, 메타 포이에시스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타당성의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만 바쁜 일상에서 얼마나 가능할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주는 의미는 서양고전 문학을 종교적, 철학적으로 해석해 허무주의 시대를 건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만 읽어도 책값을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다.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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