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tagamma Jun 06. 2022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생을 그토록 깊이 들여다보면,
고뇌까지도 그만큼 깊이 들여다보게 마련이다.
용기는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공격적인 용기는.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이렇게 말함으로써 용기는 죽음까지 죽여 없애준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통스럽고 힘들 때마다 그 감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다. '힘들다'라는 감각을 '나는 지금 힘들다고 느끼고 있구나'라는 표현으로 변형한다. 그러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었던 감각이 조금은 타자화되며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떠한 감정과 감각을 느낀다는 것은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나를 위치시키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을 느끼고 있음을  순응하고 비틀어서 바라보는 시도를 통해 그 감정과 감각을 '느낌'이 아니라 '사실'로 환기시킬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조금이나마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에 도움을 준다.


고통과 절망, 슬픔은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은 감정들이지만 모순적이게도 그것들이 없다면 행복도 존재할 수 없다. 고통과 절망이 있기에 행복과 희망을 기대하고 꿈꿀 수 있게 된다. 행복만 가득한 삶은 어느 순간 평범성으로 다가오게 되며 결국 그것을 행복이라 느끼지 못하는 수준에 다다른다. 행복과 고통은 지극히 상대적인 감정이기에 결국 서로가 있어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생의 끔찍한 고통이란 객관성을 지니지 못한다. 고통이란 감각은 감각으로 존재할 때엔 지극히 주관적이며 그것을 느끼고 있는 주체의 경험에 의존해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즉, 누군가의 고통이 다른 누군가의 고통보다 더욱 크고 끔찍하다-라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고통과 절망을 맛보며 살아간다. 세상은 경제적 환경, 사회적 환경 등 다양한 요소들을 잣대로 들이대며 수많은 인생의 고통을 저울질하지만, 누군가의 고통의 무게를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모두가 짊어지고 있는 고통의 크기는 비교 불가능하며 그 자체로서 끔찍할 뿐이다.


만약, 이 끔찍한 생을 다음 생에도 똑같이 반복해서 살아가야 한다면 어떨까.  무한히 반복되는 삶 속에서 반복되는 고통을 새롭게 마주하게 되는 지금 이 순간,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라고 되뇌어본다. 지금 내가 온몸으로 맞이하고 있는 고통은 이미 백 번, 천 번도 겪어봤던 고통임을 상기하며 기꺼이 받아들인다. 삶은 계속되고 고통과 행복도 계속된다. 그 사실에는 인간 개인의 의지가 개입될 수 없다.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관점일 뿐이다.

이전 19화 야경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