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책
'책'이라는 단어 하나에 마음이 꿀렁거린다.
여행, 휴가, 크리스마스, 사랑, 뮤지컬 등 설렘을 유발하는 몇 안 되는 단어 중 단연 으뜸은 '책'.
내게 책은 읽는 것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장식품이기도 하다. 책이 있는 공간은 그곳이 서점이든 카페든 집안 서재든 온화하고 곱다.
책을 좋아하게 된 건 13살 때였다. 어느 날 부모님은 높고 넓은 책장 2개를 다 채울 정도의 전집을 가득 들이셨다.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 그리고 잿빛 담벼락의 벽돌 두께보다 더 두꺼운 우리말 사전까지.
작은방의 한쪽 벽면이 책으로 가득 채워진 그날부터 나는 그 공간을 사랑하게 됐다. 가만 바라보다가 가지런히 꽂힌 책의 표지를 손으로 쭉 훑으며 느낀 양장의 부드러운 질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유명한 고전으로 가득했지만 당시의 내 눈엔 생소한 제목의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폭풍의 언덕」 같은 명작조차도 생경했기에 그야말로 문학의 신세계였다. 그 많은 책들 중에서 나름 신중히 고르고 고른 첫 장편이 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장장 3권짜리였는데 무슨 호기로 그 책을 골랐던 건지 아직까지 의문스럽다. 아마 완독까지 몇 개월은 걸렸던 것 같다. 내용은 다 이해했냐 하면 전혀 아니다. 내용의 반도 이해하지 못한 와중에 흥미란 건 느꼈는지 틈만 나면 책을 펼쳤다. 그렇게 신나게 읽다가 '나는 읽고 있다'를 의식하며 읽게 되더니 2권을 펼쳤을 땐 재미가 반감돼 읽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기도 했다. 누구도 부여하지 않은 의무감과 궁금증이 더해져 결국 끝까지 읽긴 했다. 덕분에 양장으로 된 장편의 외국 고전소설을 처음으로 완독 했고, 마냥 좋기만 했던 것도 아닌 이 경험은 신기하게도 지독한 책 사랑으로 이어졌다.
책의 매력에 빠져 국어와 문학 수업을 제일 좋아했던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접하고 읽었다. 그때마다 확고해지는 건 책은 삶의 나침반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해답은 책에 있었다. 내가 원하거나 내게 도움이 되는 내용뿐 아니라, 가끔은 책 속에 전혀 관련 없는 내용을 읽으면서도 나도 모르는 새에 시기적절한 통찰의 스파크가 일어나기도 한다.
언젠가 서점에서 분야별, 주제별로 꽂힌 책을 쭉 훑어보다가 멈칫한 적이 있다. 서가의 한 횡을 차지한 책들이 '괜찮다, 잘하고 있다, 당신은 소중하다'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만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니. 이것이 바로 책의 위력이지 하며 속으로 호들갑 떨었다. 촘촘히 꽂힌 다정한 책만큼 내 성긴 마음도 촘촘히 메꿔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