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내것은 아니다
“넌 보물 1호가 뭐야?”
“나? USB”
사람들의 질문에 곧잘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이상하게도 내겐 디제잉할 때 사용하는 USB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마 2017년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내 음악 취향의 집합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USB가 필요하다며 잠시 내 것을 빌려가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나는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동생의 모습은 상당히 다급해 보였다. USB를 빌려준다는 것이 굉장히 찝찝하긴 했지만, 동생은 내게 USB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설마 별일 있겠어?’ 하고 빌려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게 USB를 동생 손에 들려 보낸 후, 난 USB의 존재를 긴 시간 잊고 지냈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손이 근질근질해져 올 때쯤, 동생에게 USB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동생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두 손을 모으고 죄인처럼 내 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언니….”
나는 보았다. 동생의 마구 흔들리는 동공을. 불길한 예감이 한 번에 나를 덮쳐왔다. 우리는 한참 동안 둘 다 입을 떼지 못한 채 대치 상황을 유지했다.
“USB 안에 있는 게 날아가버렸어…“
결국 긴 침묵을 깨고 동생이 입을 열었다. 정수리에서 땀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식은땀을 흘리며 자초지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동생은 그림 작업을 위해 잠시 내 USB를 빌려갔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살펴보니 USB 안에 있는 것들이 다 날아가버렸더랬다. 하지만 너무 겁을 집어 먹은 나머지 바로 내게 이 사실을 이실직고할 수는 없었고, 며칠 동안 여러 복구 업체를 찾아가서 복구를 시도해 봤지만 일부만 복구가 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떨리는 손으로 USB를 노트북에 연결하여 바로 내용물을 확인했다. 몇몇 음악파일만이 남아있었고, 내가 장르별, 월별로 정리해 놓은 플레이리스트들은 싹 다 날아가있었다. 나는 거의 텅 비어버린 USB가 현실감이 없어서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동생은 옆에서 석고대죄를 하며 연신 사과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은 허탈함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화가 나거나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홀로 방에 앉아 이제는 허물뿐인 USB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왜 보물 1호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는데 타격감이 이렇게 적은 걸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USB안의 음악들은 쌓아만 두었을 뿐 자주 사용하는 음악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주 듣거나 디제잉할 때 사용하는 음악이 아닌데도 내가 이만큼 쌓아왔고 갖고 있다는 그 ‘부피감’만으로 만족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것들이 모두 사라졌는데도 그리 화가 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그 음악들은 내 취향 변화의 역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진짜 다 내것은 아니다. 나는 이번 USB사건을 통해 그 사실을 깨닫게 됐다. 책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내 지식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옷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내 패션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그 부피감이 나의 실력이나 재능과 비례관계에 있지는 않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일본의 유명한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의 명언도 있지 않은가. 나는 오히려 이번 기회를 통해 나를 설레게 하는 음악들로만 USB를 다시 채울 수 있었다. 0에서 시작하니 내 취향이 오히려 더 뚜렷하게 잘 보여서 좋았다. 가끔은 의도적으로 버리는 것이 나라는 사람을 더 잘 보이게 하는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하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혹시 입사 N연차, 헬스 N연차 이런 N연차 경력들에 안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연차와 실력은 전혀 비례하는 게 아닌데도 하루하루 쌓여가는 시간들에 그저 안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경력이란 말이 어디 괜히 나온 말이던가. 허투루 쌓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속으로 그동안의 시간들을 과감히 버려버리자. 그리고 오늘부터라도 충실히 하루하루를 쌓아가자. 작심삼일이 10번이면 갓생이라고 누가 그랬다.
체게바라 키링이 달려있는 USB가 책상에 가만히 놓여있었다. 나는 홀로 지난 몇 년간 나와 함께해 온 그의 가는 길에 묵념으로 애도를 표했다.
*커버 이미지 : 사진: Unsplash의 Dan LeFebv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