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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람 Oct 21. 2023

어쩌다 마주친 데뷔

꾸준함이 준 깜짝 선물


이태원의 테크노 클럽으로 유명한 ‘파우스트’에 혼자 놀러 간 날이었다. 신기하게도 나의 첫 책의 독자분이 파우스트에서 자주 플레이를 하는 디제이분이셨고, 그분과는 소중한 인연으로 종종 연락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날은 그분의 오프닝 플레이를 응원차 방문한 날이었다. 나는 멋진 오프닝 무대에 감동을 받아 요즘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그 분과 파우스트를 동시에 태그 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익숙한 아이디로 DM이 왔다. 내가 팔로우하고 있는 디제이이자 파우스트의 사장님이었다.


“혹시 DJ이신가요? 믹스셋 링크 하나만 보내주실 수 있어요?”


네? 제가요? 파우스트에요?


파우스트는 이태원을 대표하는 언더그라운드 클럽 중 하나이며 테크노의 성지라고 불린다. 국내외 유명 테크노 아티스트라면 모두가 한 번쯤 무대에 서고 싶어 하는 클럽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나도 테크노라는 장르를 처음 접했을 때 파우스트를 자주 찾았고, 파우스트는 내게 동경의 대상이자 지난 몇 년간의 웃음, 눈물, 여러 흑역사가 함께 뒤엉켜있는 추억의 공간이기도 했다.


나는 테크노 사운드가 쾅쾅 울려대는 클럽에서 그저 어안이 벙벙하여 몇 초간 눈만 깜빡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감히 나 따위가 파우스트에 믹스셋을 보내도 될까?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나의 믹스셋은 하우스 음악에 가까워서 파우스트의 스타일과 거리가 멀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만들어온 믹스셋만 몇 개던가. 나는 '사장님이 당장 나한테 디제잉을 해보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단지 믹스셋만 보내달라는 건데 그것도 안 하는 것은 그동안의 파우스트 팬으로서의 예의가 아니다!'라는 결론에 이르러 결국 가장 최근에 만든 믹스셋을 사장님께 보내드리기에 이른다. 돌이켜 보면 술기운이기에 가능했던 행동이었던 것 같다. 맨 정신이었으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어떤 믹스셋을 보내야 할지 밤새 고민했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믹스셋을 새로 녹음했을지도 모른다.


몇 시간 뒤, 사장님은 파우스트라는 베뉴에 처음으로 데뷔하는 디제이들을 소개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하나 진행할 예정인데 참여할 의향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파우스트는 클럽과 탄즈 바(bar)라는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데 나는 바(Bar)에서의 디제잉을 제안받았다. 손님으로만 드나들었던 파우스트에서 직접 음악을 틀 수 있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나는 상당히 긴장됐지만 그보다 몇 배는 더 감사한 마음을 안고 당연히 하겠다고 했다. 그냥 클럽에 놀러 갔다가 직접 디제잉을 하게 된 사람은 내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기회는 어떤 사람에게 찾아오는 걸까. 유능한 사람? 노력하는 사람? 발 벗고 나서는 사람? 다 맞는 말일 수 있지만 나는 ‘꾸준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나는 디제잉을 매일 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하게 놓지 않고 했다. 센 불로 열정을 확 데우지는 않았지만, 계속 예열하면서 좋아하는 마음의 온도를 유지해 왔다. 디깅한 곡들을 차곡차곡 모아 믹스셋도 잊을만하면 하나씩 만들어서 올렸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가 질리지 않고 좋아하는 마음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 만큼만. 열정을 불태워서 짧고 강렬하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누군가를 오래 지켜보며 은은하게 사랑하는 것도 해봄직하다. 취향의 세계는 파면 팔수록 넓고 깊어서 그의 몰랐던 면과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매력이 쏠쏠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나를 보고 도대체 디제잉을 어디다 ‘써먹으려고’ 그렇게 열심히냐고 물었다. 참으로 팍팍한 세상이다. 커리어와 연결시키지 못하면 모든 걸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치부시키는 세상. 하지만 꼭 목적이 있는 일이어야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 속에서 즐겁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국 디제잉은 내 커리어가 됐고 심지어 난 그걸 글로 쓰고도 있으니 세상만사 모를 일이다. 그저 즐거운 걸 계속하는 게 최고다.


매일 열정적으로 온 마음을 다해 하지 않아도, 손에서 놓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만으로 이르게 되는 경지가 분명히 있다. 나는 꾸준함의 힘을 믿는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선물 같은 기회가 찾아오기도 한다. 내가 파우스트에서 디제잉을 제안받은 것처럼.


2023년 4월 파우스트 탄즈바에서의 디제잉은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고자극의 짜릿한 날이었다. 멋진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과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나누는 일은 역시 즐거운 일이다. 앞으로도 나는 좋아하는 무언가가 생기면 ‘꾸준함’을 동력 삼아 페이스 조절을 해나가려고 한다. 내가 아는 한 꾸준함보다 강력한 사랑은 이 세상에 없다.




*커버 이미지: @zanmang_lo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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