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좋아하는 마음으로
헬스장에서 힘겹게 천국의 계단(스텝밀)을 오르는 데 에어팟 배터리가 나가버렸다. 순간 옆 난간을 붙잡고 절규했다. 음악은 지옥 같은 천국의 계단을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진작 에어팟을 충전해놓지 않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천국의 계단 위에서 진지하게 집에 갈지 말지 여부를 고민했다. 나는 결국 5분도 더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헬스장 문을 나섰다.
음악 없이 사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울까. 모처럼 쉬는 주말, 침대에 널브러져 넷플릭스나 보고 싶은 욕망을 겨우 이겨내고 찾은 헬스장인데 음악이 없다고 5분 만에 귀가하는 날 보며 참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이쯤 되면 음악을 듣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인지, 운동을 하기 위해 음악을 듣는 것인지 조금 헷갈린다. '정말 유난이야, 유난.'이라고 계속 읊조리다 보니, 내가 음악에 대해 최고로 유난스러웠던 2019년의 어느 날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날 제주도 중문 해변은 온통 회색빛이고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날씨가 궂었다. 안 그래도 파도가 높기로 유명한 중문 해변의 파도는 사람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셌다. 게다가 태풍 주의보도 있었다. 당연히 서핑강습은 취소라고 생각해서 살짝 아쉬워하고 있던 찰나, 주최 측에서는 예정대로 강습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날씨에 바다에 수도 없이 많이 들어가 봐서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이야기와 함께. 나 같은 초보 서퍼에게는 그저 무시무시해 보이는 바다였으나 전문가들을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사고는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 물속에서 나오다가 거센 파도에 휩쓸려 날아오는 서프보드에 머리를 세게 맞아 버린 것이다. 드라마에서나 듣던 '삐-' 소리와 함께 나는 다시 힘없이 물속에 처박혔다. 가만히 있으면 정말 죽겠다 싶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비틀비틀 해변으로 걸어 나왔다. 턱부터 시작해서 오른쪽 옆얼굴 전체에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고, 귀에서는 자꾸 바람 빠지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감지했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귀에서 이상한 진물이 흘러내렸다.
의사는 검이경을 통해 내 오른쪽 귀를 검사하더니 '고막 천공' 진단을 내렸다. 즉, 고막이 찢어져 구멍이 뚫렸다는 것이다. 구멍의 사이즈가 꽤 커 보여서 일단 청력 검사까지 하고 난 후 수술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대기실에 앉아서 청력검사를 기다리는데 그 시간이 영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수술'이라는 단어도 무서웠지만 제일 무서웠던 건 '음악을 더 이상 못 들으면 어떡하지'하는 생각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든 게 나도 의외여서 놀랐다.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나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 또는 일상의 소음 같은 것들이 아니라, 음악이 가장 먼저 떠오르다니. 더 이상 음악을 들을 수 없다면 내 삶이 얼마나 어두울까 생각하니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손에 땀이 났다. 아마 마지막으로 무엇인가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면, 난 누군가와의 통화를 선택하지 않고 내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으리라. 다행히도 내 고막은 수술 없이 자연 치유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청력에도 크게 이상은 없어서 지금도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음악 없이 사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울까. 어느 소설에 나온 문장처럼 하루에 좋은 음악을 하나만 발견해도 좋은 하루가 된다고 믿는다. 얼마 전 별세한 일본의 예술가 류이치 사카모토는 그의 저서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에서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며, 시간이라는 직선 위에 작품의 시작점이 있고 종착점을 향해 나아간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좋은 음악을 듣는 것은 흘러가는 시간에 행복감을 새기는 일일 것이다. 또, 시간은 모여서 하루가 되고 하루는 모여서 삶이 되므로, 결국 좋은 음악을 듣는 일은 좋은 삶을 사는 것이 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꽤 자주 유난을 떨며 혼자 클럽에 다닐 것 같다. 클럽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하나라도 더 발견하고 감탄하며 마음껏 환호할 것이다. 수많은 클럽에 다녀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된 지는 모르겠지만 하루하루 더 행복한 사람이 된 건 확실하다.
그저 좋아하는 마음으로 썼다. 내 젊은 시절 일터가 아닌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곳에 대하여, 그리고 가장 깊이 마음을 쏟은 행위에 대하여. 내가 한때는 불같이 사랑했고 지금은 꾸준하고 은은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누군가 내 글을 보고 언더그라운드 클럽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아주 조금이라고 바뀌었다면 나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가을, 클러빙하기 좋은 계절이다. 이번 주말에는 또 어딜 가볼까 생각하며 인스타그램을 뒤적거리고 있으니, 어김없이 또 설렌다.
*커버 이미지 : https://unsplash.com/ko/@davidyloz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