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매칭과 티핑 포인트
놀러 다니길 좋아하던 나는 자연스럽게 디제잉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2015년 연말즈음 용기를 내어 당시 학동역에 있는 디제잉 아카데미에 친구와 함께 2:1 레슨을 덜컥 등록하고야 말았다. 그때의 목표는 조촐하게 친구들이랑 음악 틀고 놀 수 있을 정도로만 디제잉을 배워보자였다.
두근두근 첫 수업.
이미 상상 속에서 나는 내가 익히 봐왔던 디제이들처럼 여유롭고 멋지게 디제잉 중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디제잉 장비를 보자마자 내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말았다. 그렇다. 난 기계치였던 것이다. 디제잉 장비의 원리를 이해하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이제와 간단히 설명하자면 디제잉은 오른쪽 플레이어 1개와 가운데 믹서 1개, 그리고 왼쪽 플레이어 1개가 구성되어 있으면 할 수 있다. 오른쪽 플레이어에서 나오는 음악과 왼쪽 플레이어에서 나오는 음악을 가운데 믹서로 자연스럽게 섞는 것이다. 지금이야 이렇게 요약해서 설명할 수 있지만 당시 나는 뱅글뱅글 돌아가는 눈으로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선생님이 잠시 연습시간을 주고 자리를 비우면 거의 녹아내리는 몸으로 친구의 어깨에 기대어 항상 이렇게 속삭이는 식이었다.
"그래서 아까 그게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줘..."
선생님의 인내심 있는 레슨과 친구의 보충설명으로 나는 간신히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다. 음악의 소리를 high, mid, low 구간으로 나누어 믹스하는 EQing의 개념까지도 어떻게 잘 이해했던 것 같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1번 곡의 특정 구간 볼륨을 줄이면 2번 곡의 볼륨을 채워 주는 식으로 사운드 밸런스를 맞춰 주는 게 핵심이었고 주로 어떤 소리들이 어느 구간에 분포해 있는지 알면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비트매칭이라는 녀석이었다. 이 녀석은 아주 고약했다. 비트매칭이란 두 곡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곡의 빠르기(bpm)와 박자(beat)를 맞추는 기술이다. 곡의 빠르기는 CDJ라는 플레이어에 다 표시가 되어있었고 컨트롤러를 통해 조절만 하면 됐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었다. (후에 바이닐 디제잉 때는 이게 문제가 되지만 여기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두 곡의 첫박을 딱 맞춰서 음악을 틀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이게 죽어도 안 되는 것이었다. 두 곡의 첫 박을 맞춰서 틀지 않으면 아주 듣기 싫은 시끄러운 소리가 나거나 어색한 믹스가 되어버리고 만다.
디제잉 장비 앞에서 어렸을 때 피아노를 8년 쳤다거나 한국 무용을 했다거나 하는 음악적 이력 따위는 아주 약간의 힘도 못쓰고 고이 접어두어야 했다. 나는 곡에서 첫 박을 아예 못 찾기도 했고, 찾았다 해도 다른 곡과 전혀 맞추지를 못했다. 디제잉 장비 위에서 내 두 손은 갈 곳을 잃었고, 믹스는커녕 헤드폰을 끼고 멍하니 음악감상을 하고 있기 일쑤였다. 비트매칭은 디제잉에서 매우 기본적인 기술이지만 이 단계에서 중도 포기하는 수강생이 정말 많다고 했다. 귀가 트이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음악을 듣고 춤을 추는 것과 음악을 트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음식을 먹는 것과 음식을 만드는 것이 전혀 다른 세계이듯이.
비트매칭은 아주 서서히 나를 미치게 했다. 처음엔 우연처럼 “어? 됐다.” 하게 하면서 이게 나의 실력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했고, 이후엔 될 듯 말 듯 자꾸 안 됐고, 이후엔 잘 되다가 다음 주에 연습실에 가면 실력이 리셋돼서 절대 안 되는 식이었다. 그렇게 미치고 팔짝 뛰는 기간이 거의 1년이었다고 하면 믿겠는가. 나는 중간에 디제잉과의 이별을 몇 번이나 거듭했다. 그도 그럴 것이 2015년 나는 회사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었고 주말엔 방전되어 누워있거나 음악 들으러 다니기 바빴다.
그러다가 내 귀가 트인 것은 2017년의 어느 날이었다. 디제잉과의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다 좋은 기회로 청담에 있는 라운지바에서 음악을 틀어볼 기회를 얻었다. 연습실 나가기가 너무 귀찮은 나머지 디제잉 장비를 집에 들였는데 이때 비트매칭의 신께서 드디어 내게 손을 내미셨다. 디제잉 장비를 계속 만지다 보니 거짓말같이 이제 더 이상 어떤 것이 제대로 된 비트매칭인지 헷갈리지 않는 순간이 온 것이다.
모든 일에는 ‘티핑 포인트’가 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 갑자기 확 변하는 지점이다. 사실 그 이전에 서서히 변화를 쌓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급변점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눈에 띄는 변화가 없는 상황을 잘 견디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우리는 원하던 목표를 이루기까지 딱 한 걸음 전인지도 모르고 지속해 오던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해버리고 만다. 나의 티핑포인트는 디제잉 장비를 집에 들이고 비트매칭을 연습한 잠깐의 기간이었다. 내가 그전에 도저히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비트매칭을 포기해 버렸다면 어땠을까. 디제잉이 없는 지금의 내 인생은 몇 배로 재미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좀 끔찍하다.
*티핑 포인트 (tipping point): 티핑포인트는 튀어 오르는 포인트를 말한다. 대중의 반응이 한순간 폭발적으로 늘어날 때, 광고 마케팅이 효과를 발하며 폭발적인 주문으로 이어질 때 등을 일컫는다. 터닝 포인트라는 표현도 사용할 수 있으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진행 방향과 다른 새로운 길을 갈 때 '터닝 포인트'라고 하는 반면, '티핑 포인트'는 수면 아래에 있던 노력의 결과가 수면 밖으로 튀어 오를 때 쓰는 용어다. (출처: 위키백과)
내가 좋아하는 박정민 배우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박정민 배우는 2011년 영화 <파수꾼>으로 데뷔한 이후 5년의 무명 생활을 거쳤다. 시간의 개념은 상대적이겠지만 무명의 5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닐 것이다. 그는 그 시간 동안 주변에 배우로서 잘 되는 친구들을 보며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고, 부정적인 자학과 함께 점점 냉소적인 사람이 되어만 갔다. 그렇게 배우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유학길에 오르려고 고민하던 찰나, 거짓말같이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 캐스팅되어 그간 쌓아온 실력이 마침내 빛을 발할 수 있게 된다. 그가 영화 <동주>까지 단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비행기를 타버렸다면 우리는 충무로의 많은 영화들에서 박정민이라는 배우의 빛나는 연기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에는 티핑포인트가 있다. 나의 다음 스텝이 티핑 포인트가 될 수도 있으니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걸음만 더 내디뎌보자. 오늘 아침 탄 공복 사이클 20분이 내일의 갑작스러운 1kg 감량이 될 수 있고, 귀찮지만 편집해서 올린 오늘의 동영상이 내일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100만 조회수를 찍게 될지도 모르니까. 내가 꾹 참고 내디딘 단 한걸음이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줄 수 있다.
* 커버이미지: Unsplash의 Panagiotis Falc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