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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보람 Mar 20. 2023

울음이 녹기 시작했다

#10  패배하는 돼지들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잠이 엉겨 붙은 눈을 비비며 화면을 확인하니 회사에서 온 전화였다. 새벽 다섯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이 사람아, 지금 태평하게 잠이나 잘 때가 아니야. 냉동창고에 아주 난리가 났어. 밤새 전력 공급이 끊겼는데 비상 발전기가 안 돌았나 봐.”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옷을 입었다. 신발을 신고 있는데 등 뒤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바로 현관을 나섰다.


  냉동창고에 들어서자 비린내가 훅 끼쳤다. 벽면에 가득했던 성에가 녹아내려 바닥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갈고리에 걸려있던 돼지들의 몸에서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며 각자의 피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돼지들이 패배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축사 안에서 서로의 몸을 이빨로 물어뜯는 돼지들, 주인의 전기 충격에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돼지들, 근육 이완제를 맞고 무너지듯 바닥으로 쓰러지는 돼지들.


  기계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력이 다시 복구된 모양이었다. 목덜미에 서늘한 냉기가 스쳤다. 창고를 나오니 입구 밖에 사장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온몸을 덜덜 떨었다.

  “괜찮으십니까?”

  사장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넋을 놓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는 창고 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표정만 보면 창고가 아니라 까마득한 어둠 속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줄지어 매달린 돼지들 수십 마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수십 명의 사람들이 허공에 매달려 피 흘리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눈앞이 흔들리면서 현기증이 일었다. 그를 일으켜 세워 사무실로 데려가 소파 위에 눕혔다. 그리고 그대로 회사를 나와 도망치듯 집으로 향했다.


  건물에 들어서자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두렵고 절박한 소리였다. 집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소리는 점점 커졌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마치 내 귀에 대고 우는 것 같았다.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아 귀를 기울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집 안에는 창문으로 들어온 마른 빛들이 퍼져 있었다. 고막이 터질 것처럼 시끄러운 울음소리와 달리 허공에서 먼지들이 느리게 부유하고 있었다.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나는 냉동실에서 발견한 그것을 떠올리며 불안한 표정으로 부엌을 쳐다보았다. 이 소리가 저 안에서 나는 것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떨리는 손을 뻗어 천천히 냉동실 문을 열었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대체 어디서 나는 거야! 신경질적으로 귀를 틀어막는 순간 울음소리가 선명하고 정확하게 들렸다. 나는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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