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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보람 Mar 20. 2023

울음이 녹기 시작했다

#9  새끼손가락 절반 길이의 불꽃

  집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앉은 다음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관자놀이 부근이 뻐근해지면서 두통이 일었다. 쿵쿵. 부엌에서 문을 두들기는 것처럼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선반에 올려 둔 반찬통이 떨어진 게 아닐까. 의심하는 사이 다시 소리가 들렸다. 분명 냉장고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어깨 근육에 긴장감이 돌면서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것이 있을 리 없는데. 나는 조금 전 그것을 한강에 버리고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다시 몸을 일으켜 냉동실 문을 천천히 열어 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핏줄이 터질 것처럼 충혈된 눈으로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점이 있었다. 한쪽 날개 부분이 불에 그슬려 녹아내린 것처럼 형체가 일그러져 있었다. 반대편 날개는 벌레가 갉아 먹은 나뭇잎처럼 너덜거렸다. 


  분명 냉동실 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무렇게나 자라난 이빨과 녹아내린 표면 때문에 생김새를 알아보기 어려웠는데 자꾸 보니 처진 눈과 뭉툭한 코가 낮에 본 시신의 얼굴과 비슷했다. 무엇보다 그것의 몸에서 소독약으로 닦인 시신 냄새가 났다. 그것을 쳐다보다가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왜 이러는 거야?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는 그것이 내 말을 듣고 있는 것처럼 소리를 질러 댔다. 캄캄한 허공을 가르고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아 충동적으로 그것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것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러나 작은 얼음 조각이 여기저기 떨어졌을 뿐 균열조차 가지 않았다. 아주 단단한 돌덩이 같았다.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불을 켜자 새끼손가락 절반 길이의 불꽃이 타올랐다. 어둠 속에서 둥근 빛이 생기면서 그것의 모습이 도드라졌다. 나는 라이터를 그것의 날개에 가져다 대었다. 조금 기다리자 땡볕 아래 세워둔 얼음 조각처럼 물을 뚝뚝 흘리며 녹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식은땀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날개가 사라지자 웅크리고 있는 다리와 몸을 감싸고 있는 팔에도 불을 가져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빠르게 녹아내렸다.

  테이블 위로 액체가 느리게 퍼져 나갔다. 심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것을 싱크대로 옮긴 다음 물을 틀었다. 수도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길가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아내렸다. 나는 것이 아주 작은 조각이 될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침내 남은 조각까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목에 걸려 있던 숨을 크게 뱉어 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예리하게 날을 세운 얼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가 너무 생생해서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누군가 나를 손아귀에 움켜쥐고 힘껏 뭉그러뜨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폭우처럼 쏟아지는 눈발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입속으로 눈발이 빨려 들어왔고 부드러운 살을 찢으며 팔과 다리로 퍼져 나갔다. 내 몸이 단단하게 얼어붙었고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앞으로 날카로운 갈고리가 날아와 가슴을 관통하자 몸이 반으로 쩍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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