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보람 Mar 20. 2023

울음이 녹기 시작했다

#8  태어나기를 고대하는 태아의 발길질처럼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사이 다시 콧등에 땀방울이 맺혔다. 한여름이라 그런지 저녁까지 후덥지근했다. 창문을 열고 침대 위에 걸터앉자 온몸에 힘이 풀어졌다. 벽에 등을 기댄 상태로 텔레비전을 켰다. 발랄한 춤을 추며 눈을 찡긋거리는 여가수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채널을 바꾸자 다큐가 나왔다. 늙은 코끼리가 태양이 작열하는 아프리카 초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풍경에 시선을 멈춘 순간 화면이 꺼지고 정면을 응시하는 나의 무표정한 얼굴이 비쳤다. 이어서 방과 부엌까지 전등이 나가 버렸다.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래층에서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리는 사람의 둥근 머리통이 보였다. 사람이 있는데도 불이 꺼진 걸로 보아 정전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문득 출근길에 들었던 뉴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열대야가 지속되면서 전력난이 심각해졌다는 내용이었다. 도미노처럼 세워진 다른 건물에도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길게 이어지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사라지자 정적이 흘렀고 깊은 무덤 속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불현듯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그것이 떠올랐다. 휴대폰으로 불빛을 비추며 천천히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냉동실을 열어 보니 그것은 핏발 선 흰자위를 드러낸 상태로 얼어있었다. 하루 사이에 눈을 뜬 모양이었다. 금방 전기가 나간 터라 냉동실에서는 여전히 냉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전등은 켜지지 않았고, 이제 그것은 다른 음식들과 함께 녹아내리기 시작할 것이었다.

  나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그것의 눈을 마주 보았다. 무언가를 보고 크게 놀란 것처럼 그것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두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그것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나는 그것이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뜩한 기분에 소름이 끼치자 허겁지겁 밖으로 나와 근처 마트로 달려갔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것을 버리고 온다면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을 터였다. 

  냉동 코너에서 사각 얼음이 잔뜩 들어있는 봉지를 집어 들고 계산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싱크대 아래 선반을 뒤져 포장 용기를 꺼냈다. 냉기를 가두는 역할을 하는 포장 용기에는 회사 이름이 찍혀있었다. 입구를 벌려 그것을 넣은 다음 얼음을 쏟아부었다. 


  집에서 마포대교까지는 사십 분이 넘는 거리였다. 다리 밑에 도착하자 밤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나는 강을 바라보고 앉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두어 번 숨을 들이마셨을 때였다. 툭, 툭툭. 태어나기를 고대하는 태아의 발길질처럼 미약하지만 확실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얼음이 녹으면서 깨어난 것은 아닐까. 짧게 태운 담배를 꺼 버리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강가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물속으로 던졌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튀어 올랐다. 그것은 꽤 무게가 있어서 눈 깜짝할 사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강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고요했다.

이전 07화 울음이 녹기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