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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노래만 칩니다

모르는 노래는 손가락이 거부한다

by 피터의펜

기타 학원을 다니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내가 아는 음악을 배울 때는 유난히 즐겁다는 거다. 반대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가 나오면 흥미가 눈에 띄게 식는다.


선생님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마음이 그렇다.


열심히 해야 실력이 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손가락도 함께 멈춰버린다. 슬프지만, 이건 정말 사실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손이 가는 건 결국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노래는 학원에서 가르쳐주지 않아도 혼자 유튜브를 뒤적이며 흉내를 내본다.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라던 이무진의 노래가 그랬고, 어릴 때 들었던 '너에게 난, 나에게 넌'도 그랬다.


잡기 까다로운 코드도 있고 어려운 솔로나 멜로디도 있지만, 그런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선수처럼' 칠 생각은 없고, 그냥 느린 속도로 따라 하는 '생활 기타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웃긴 건, 이 과정이 은근히 재밌다. 여러 기타 유튜버가 시키는 대로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서 음을 내는데, 그 소리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노래의 박자와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 기쁨은 말도 안 되게 크다.


최근에는 얼마 전 정주행을 끝낸 귀멸의 칼날 OST, 바로 '탄지로의 노래'에 빠져버렸다.


잔잔하게 시작해 점점 고조되는 그 분위기.

듣기만 해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슬픔.

또 이야기의 맥락을 알고 있으니 뒤로 갈수록 피어오르는 희망.


이걸 기타로 치고 싶지 않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몇 주 전, '클래식 OST'를 밤낮으로 붙잡고 연습해 본 전력이 있다. 덕분에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일단 인터넷 검색부터 한다.


"탄지로의 노래 기타 악보"


이 악보가 '정상인이 칠 수 있는 버전'인지, 아니면 '미치광이가 낙서한 난이도'인지 확인해야 한다. 만약 어려운 버전이면 그냥 포기하면 된다.


내가 탄지로에게 빚을 진 것도 아니고...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찾다 보니 도전 가능한 버전이 있었다. 5 카포에 Am 코드로 시작한다. 이 정도면 지금 나한테 딱 좋은 난이도다. 프렛 간격도 좁아졌고 음도 예쁘다. 기분까지 좋아진다.


처음에는 그저 기타를 잘 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좋아하는 노래만 찾아 연습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학생 때도 이랬던 것 같은데?"


수학만 죽어라 파고들고,

국어는 애써 외면하고,

사회는 시험 전날 밑줄 친 부분만 보던 내가

아무렇지 않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더니 나이를 먹어도 정말 안 변한다. 좋아하는 건 끝까지 붙잡는데, 관심 없는 건 손끝 하나를 안 움직인다.


'기타에서도 똑같다니.'


이걸 인정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막상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그래,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었지."


괜히 자책하는 마음도 줄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좋아하는 노래를 천천히 연습하는 과정이 왜 그렇게 재밌는 지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그 노래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첫 소절만 들어도 내 기억과 감정이 먼저 움직이고, 손가락은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간다. 속도는 느리지만, 어쩌면 마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몸이 뒤늦게 익혀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조용히 깨닫는다.


무언가를 배울 땐

억지로 해봐야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누가 시킨다고 되는 일도 아니라는 걸.

결국 마음이 움직여야 비로소 손가락도 움직인다는 걸 말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연습한다는 건 이렇게 작은 리듬을 따라 조금씩 나를 그 음악으로 다시 데리고 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어제보다 아주 조금 더 나아지는 기분을 내게 준다.


별것 아닌데, 어쩔 때는 그걸로 하루가 충분해진다. 그래서 오늘도 기타를 잡는다. 잘 치고 싶어서라기보다, 그저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었기에 조용히 소리를 내본다.


배움이라는 건

원래 그렇게 조용하고,

원래 그렇게 느리고,

원래 이렇게 작은 기울임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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