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는 상상에도 힘이 있을 때
기타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불현듯 '남의 집 사정'이 궁금해졌다.
그 대상이 바로 이 '기타 가게'다.
은근히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도 않고, 너무 붐비지도 않는, 묘하게 균형 잡힌 채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곳이다.
고정 손님과 뜨내기손님 비율은 얼마나 될까?
수입과 지출 구조는 또 어떻게 될까?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이 가게가 왜 갑자기 궁금해졌는지 나 스스로도 의아하다.
참, 오지랖도 풍년이다.
이 가게를 이해하려면 사람부터 알아야 한다.
그곳에는 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사장님이 있다.
사장님 나이는 진짜 알 수 없다.
50대 같기도 하고,
60대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사장님 몇 년생이세요?” 하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타를 친 경력이 30년이었나, 40년이었나. 분명 내 귀로 들었는데 시간 지나니까 또 헷갈린다.
단 하나 확실한 건, 연주와 말투, 손목의 각도 하나까지도 허투루 움직이는 게 없다는 것이다.
'아, 이분은 그냥 고수가 아니라 진정한 고수다'
그런 아우라가 있다.
게다가 패션도 묘하게 힙하다.
후드티와 찢어진 청바지를 조합으로 입는다.
그게 기타 치다가 불편해서 찢은 건지, 아니면 그냥 발가락이 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만큼은 젊게 보인다. 음악을 오래 곁에 둔 사람의 여유로움 같은 것이 비친다.
예전에 수업 중, 김광석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노래가 워낙 명곡이고 나도 모르게 오래 들으며 살아온 사람이기도 해서 자연스럽게 얘기가 이어졌다.
게다가 기타로 치기도 좋아서 요즘 들어 더 관심이 가는 곡들이다.
그런데 사장님이 그때, 김광석을 두고 마치 동네 친구 얘기하듯 툭툭 말을 던지는데 나는 그 순간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
"어? 이분... 혹시 김광석이랑 또래였던 건가?"
나중에 검색해 보니 김광석은 1964년생이다. 살아 있었다면 지금 62세다. 그리고 사장님 역시 그즈음 세대일 거라는 어렴풋한 감이 왔다.
62세.
나보다 한참 위,
막둥이 삼촌 정도의 나이다.
그런데 그 나이에 이분은 여전히 이 가게에서 학생을 맞고, 손님이 있든 없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타 학원 선생님이면서,
동시에 악기점의 사장님.
이 모습이 왠지 좋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잠깐이지만 진심 섞인 상상을 한다.
"나도 이런 가게 하나 운영하면 어떨까?"
물론, 곧 정신이 든다.
기타는 개뿔도 못 치는 주제에 어디서 감히 이런 상상을 하나 싶다. 그러다 또 혼자 어이없어 웃다 보면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완전히 모노드라마를 찍고 있다.
그래도 요즘은 이 가게에 와서 수업을 듣다 보면 마음이 묘하게 이상해진다.
입지는 조금 애매한데도 주차는 또 널널해서 편하다. 손님이 많지는 않아 보이는데 이 정도면 먹고는 살겠다 싶다.
기타도 팔고, 액세서리도 팔고, 수리도 하고, 레슨도 하고, 이쯤 되면 이곳 사장님은 악기점 운영의 달인인가 싶다.
이분이 부모님처럼 나를 애정으로 챙기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막역한 친구처럼 수다를 떠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악기점 사장님을 응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연예인 걱정하듯 말이다.
'이 가게 망하면 안 되는데... 잘 됐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러다 문득 또 생각한다.
"나는 저 나이가 되면... 뭘 하고 있을까?"
쓸데없는 상상인데
또 묘하게 진짜 같다.
40년이라는 숫자는 정말 말도 안 되게 크다. 이분이 기타 치며 쌓아 올린 40년은 그 자체로 엄청난 서사다. 나는 아직 40주도 꾸준히 못 해봤는데 40년이라니.
그런데 이상하게 그 긴 시간의 결과물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올라온다.
"딱 절반만. 그러니깐 나도 20년 정도는... 꾸준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내가 당장 권리금을 마련해서 악기점의 뒤를 잇겠다 이런 건 절대 아니다.
기타 지식도 없고,
수강생들보다도 더 못할 텐데
운영이 잘 될 리도 없다.
그냥, 상상하는 거다. 먼 미래의 일을.
정말로 쓸데없지만, 또 어쩌면 20년 뒤엔 가능할지 모르는 그런 이상한 상상을 해본다.
혼자서 조용히 해보는 상상이다. 자면서 꾸는 꿈이 아니라, 잠들기 전에 슬며시 마음속에 품어보는 그런 '소망 쪽에 가까운 꿈'이 되어버렸다.
지난번에는 수업 도중 사장님이 갑자기 기타 가게 운영 철학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얼마 전까지 C에서 G7으로 코드 전환도 버벅거리던 사람이었는데 이분은 매우 진지한 얼굴로 '악기점으로서 성공하려면 무엇 하나 허투루 하면 안 된다'며 노하우를 전하는 것이다.
누가 보면 내가 곧 창업 준비하는 사람 같다.
그때 조금 당황했지만, 동시에 아주 잠깐, 기타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내 모습이 스쳤다.
"저 모습... 어쩌면 나일 수도 있겠는데."
내가 지금부터 20년을 꾸준히 쳐서 60대가 되었을 때, 정말로 그 가게 문 앞에 서 있다면 누가 찾아올까?
아무도 오지 않고 그냥 바람만 쓱 지나갈까?
나는 혼자 앉아서 기타만 만지작거리고 있을까?
아마 제일 먼저 찾아올 사람은 훌쩍 자란 아이들일 것이다.
레슨 받으러 오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사주러 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날 놀리러 올 게 뻔하다..
"아빠 당근케이크랑 커피 시켜 먹자."
"아빠, 오늘은 손님이 한 명도 없었어?"
생각만 해도 짜증 나고,
생각만 해도 귀엽다.
이상하게 요즘 기타 치면서 그런 감정이 종종 찾아온다.
뭐, 사실 기타 가게가 아니어도 된다.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치킨집을 차리거나 카페를 열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냥...
무언가를 꾸준히 그리고 여전히 붙잡고 있는 '내 모습'이 상상 속에서라도 보인다는 것이 좋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해주다 보면 언젠가는 새로운 걸 도전할 기회도 슬쩍 따라올 것 같으니까.
그리고 그 첫걸음이 지금 나이 마흔에야 허둥지둥 시작한 기타라면, 그것도 꽤 괜찮은 스토리다.
나는 그냥, 지금 이 속도로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가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