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례 명절이나 제삿날이면 평소에 연락 없이 지내던 먼 친척들 소식을 듣게 되곤 한다. 어느 집이나 비슷하겠지만 그렇게 들려오는 소식이 늘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너머로 고모 얘기를 하시는 엄마 심기가 편치 않아 보였다.
이제는 첫 문장만 나와도 아! 또 그 레퍼토리 시작하는구나 싶다. 일단 말하자면 나는 중립이라고 변명을 해둔다. 그런데 엄마의 하소연을 듣다 보면 딱히 고모 편을 들고 싶은 건 아닌데도 대뜸 엄마한테 그러지좀 말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그런데 사실 고모가 나를 붙잡고 하소연을 했더라면 나는 분명 엄마 편을 들었을 거다.
이런 내 마음을 모르시는 우리 엄마는 고모 편을 드는 나 때문에 그렇잖아도 불편한 심기에 서운함까지 더해져서 상처를 받으시기 일쑤다. 가족은 역시 어렵고 복잡한 것이다. 엄마가 ‘아니 그냥 그랬다는 거지...’하고 말끝을 흐리시면서 힘없이 전화를 끊고 나면, 내 마음은 서늘해지기 시작한다. 후회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게 후회할 말을 왜 하는 건지... 철은 언제 드는 거냐고! (Photo by Pixabay)
그 순간 보영이가 생각났다. 소꿉친구인 보영이는 참으로 효녀다. 오빠와 두 언니가 있는 막내이자 늦둥이로 태어난 그녀는 부모님이 연로해 가시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고 한다. 그녀는 부모님이 사시는 시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 틈날 때마다 찾아뵙고 장도 자주 봐다 드린다. 어디 불편하시다 하면 그대로 차를 몰아 병원으로 내닫는다. 여든을 훌쩍 넘으신 부모님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의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그녀는, 그래서 뭐든지 생각나면 바로 실행에 옮긴다. 느닷없이 부모님을 모시고 온천을 가는 일은 흔한 일이다.
그런데 엄마 전화를 끊으면서 그녀 생각이 든 이유는, 보영이 모녀의 전화통화가 나와 우리 엄마와의 그것과는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엄마와 딸의 대화는 어디나 비슷할 거다. 물론 보영이 어머님도 딸을 붙들고 동네 누구누구나 친척 누구누구에 대한 불평을 많이 하신다고 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 친구 보영이는 나처럼 엄마께 면박을 드리는 대신, 오히려 큰소리로 과장하면서 더 많이 불평을 해 드린다고 한다.
그건 작은 아버지가 잘못했네~ 아휴~ 엄마 진짜 속상했겠다! 나까지 막 화나네.
아니, 그 할아버지 왜 그러셨대? 뭐라고 소리 좀 지르지 그랬어.
그 아줌마 웃겨 정말! 그 아줌마가 뭔데 엄마한테 그런 소릴 해?
그렇게 오버해서 막 열을 내다보면 오히려 엄마가 ‘아니 그렇게까지 맘 상했던 건 아니고...’하시며 마음을 푸신다고 한다. 어찌 보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유치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넉살 좋은 그녀의 현명함이 정말 존경스럽다. 그녀가 부모님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설명해줬던 적이 있다.
“어차피 누가 옳고 그른가는 내가 따질 일이 아니라 이미 다 알고 계실 거야.그런데... 나이 먹으면 다시 어린애로 돌아간다잖아. 엄마가 그런 얘기를 하시는 이유는 뭘 판단해 달라는 게 아니라 서운했던 마음을 그냥 들어달라는 것뿐이야.그러니까 얘기 들으면서 맞장구 쳐드리는 게 최선이지.그럼 마음이 좀 풀리시는 것 같거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그녀는, 그래서 학교에서도 좋은 교사인가 보다. 보영이 어머님은 보영이를 너무 늦둥이로 가지셔서 망설임 끝에 낳으셨다는데, 참으로 예쁜 복덩이를 얻으셨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가여운 우리 엄마는 어쩌지? 엄마 마음 하나 헤아리지 못하고 주제넘게 훈계나 하는 딸을 두셔 가지고, 엄마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이럴 때면 내 성질머리 진짜 마음에 안 든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고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걱정하고 계실 우리 엄마는, 이렇게 멀리 사는 내가 얼마나 보고 싶으실까?
다음번에 엄마가 누구 흉을 보시면 나도 막 오버해서 열 내드리리라 결심한다. 무조건 그 사람이 잘못한 거라고 큰소리쳐 드릴 거다. 그게 무슨 일이든, 그 누구 앞이든, 나는 엄마 편이라고 요란을 떨거다.그러니 혹시라도 우리 엄마를 털끝만큼이라도 건드릴 계획이 있으시다면, 그게 누구든 이미 당신이 유죄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이 글을 쓰다보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 덕분에 이 예쁜 밤, 31분 12초 동안 사랑하는 엄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오늘은 골다공증 검사를 위해 내과에 가실 예정인데, 검은색 패딩이 무거워서 빨간색 패딩을 입고 가신단다. 지난 이틀간 기승을 부리던 미세먼지가 잦아들었지만 대신 날씨가 쌀쌀하다 하신다. 아빠 새벽 운동 나가실 때 단단히 입고 나가시라고, 엄마 병원 가실 때 머리 서늘하지 않게 패딩 모자 꼭 쓰시라고 나는 잔소리를 덧붙였다. 이런 사소한 대화가 오늘따라 더없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참고로 오늘은 못된 성질 안 부렸다.
오늘 하루 종일 추적추적 비가 내렸고 마음도 질퍽거렸던 참인데, 엄마 목소리를 듣고 났더니 억울했던 오늘을 투덜투덜 일러바치고 싶어 진다. 그럼 엄마가 막 오버해서 열 내주실 게 분명하니까. 그래서인지 그런 엄마 마음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위로받은 기분이다. 그리고 내가 평생 엄마께 이거 하나를 못 해 드렸구나 싶어 마음이 두 배로 더 아프다. 천 번 만 번 보고 싶고 냄새까지 그리운 엄마, 나는 이제 꿈속에서나마 엄마를 꼬옥 안아드리러 간다.
우리 엄마는 꽃을 정말 잘 피우신다. 예쁜 꽃들을 보면 창문 너머에 꼭 엄마가 계실 것만 같다. 엄마는 꽃이다. (Photo by 파리제라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