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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제라늄 Oct 19. 2019

메롱의 마법

웹페이지를 서핑하다가 우연히 만난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지난 2016년 말쯤에 방영되었던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의 두 번째 시즌이 내년 초에 방영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시즌을 아주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났다. 그게 벌써 3년 전이라니... 젠장, 시간이란 녀석은 정말이지 낭만도 없다. 문득 3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당시 내게 아주 의미 있었던 한 장면이 떠올라 피식 웃음 지었다. 재미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황당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굉장히 신선했던 장면은 바로 이랬다.




큰 병원의 이사장이자 수많은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회장님의 수술이 끝난 시점이었다. 의학적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뭐 드라마니까 그렇다 치고. 회장님의 심장을 대신하고 있던 인공심장을 교체하는 아주 복잡한 수술이었는데, 수술 전 검사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폐암 말기 진단까지 나온 참이었다. 이 수술이 성공하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전문의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게다가 모든 드라마에서 그렇듯 대립관계에 있던 사람들은, 김사부라는 이름의 의사가 완전히 매장될 수 있도록 수술의 실패를 손 모아 기도하는 상황이었다.


수술 시간 단축이 최대의 관건이었던 이 수술은, 기적을 반복하면서 일반 수술 시간보다 두 배나 빠르게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런데 문제는, 회장님이 깨어나지를 않는 것이었다. 수술 이후 의식이 돌아온다는 통상적인 예상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고, 마침 이때다 뇌사라고 주장하며 나서는 악역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회장님은 아주 건강한 상태로 눈을 뜨며 깨어났다.


그를 완벽 이상으로 신뢰했던 환자의 담당 의사로서, 그리고 그의 병원과 팀원의 미래가 달린 최악의 긴장 상태에서 맞이하게 된 이 순간이, 김사부에게 얼마만큼 다행이고 간절했던 순간이었을까? 게다가 그의 인생을 줄기차게 괴롭혀왔던 원수 같은 병원장 앞에서 얼마나 통쾌한 순간이었을까? 


앗싸~! 이 절호의 복수의 순간, 김사부가 그의 숙적 앞에서 어떤 식으로 보란 듯이 멋지게 굴어줄까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김사부는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병원장의 면전에, 어떤 그럴싸한 명언 따위를 쏘아주며 멋진 척을 하지 않았다. 대신 눈썹을 삐죽 올림과 동시에 혀를 쏘옥 내밀며 ‘메~롱’을 했을 뿐이었다. 


그 장면을 당황스러워한 사람은 드라마 속 의료팀뿐만이 아니었다. 배우 한석규 씨가 능청맞은 연기를 카리스마 있게 잘하시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완벽히 허를 찌르는 그 순간을 그야말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참 어이가 없었다. 


드라마를 관통하는 스토리 중에서 가장 긴장이 고조된 순간, 분위기 또한 살얼음 같이 얼어붙어 있었다. 두 인물 간의 평생에 걸친 갈등을 고려하면, 심지어 아주 무거운 순간이었다. 폭행과 죽음도 서슴지 않고 등장할 만큼 자극적인 것이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연출 아니던가? 얼마든지 극적으로 표현해 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 이 클라이맥스에 고작 메롱이라니!


하지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저 반쪽의 혓바닥이 한 번 날름거렸을 뿐인데, 묵직하게 쌓여왔던 무엇인가가 물거품처럼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백 년이 지나도 천년이 지나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주인공 사이의 원한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공중에 흩어지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은 대단히 성스러운 용서라기보다는 차라리 무시에 가까운 것이었다. 내 마음을 흔든 것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거는 싸움에 대꾸를 하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를 괴롭히는 이유는 상대방이 괴로움을 느껴야 제 맛이 아닐까? 그런데 만약 걸어오는 시비를 농담인 척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마음 아프라고 퍼붓는 욕설을 못 들은 척할 수 있다면 어떨까?


약점을 살살 건드리며 조롱하는 사람 앞에서 두 어깨를 으쓱하며, ‘음! 네 말 들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그런 면이 있기도 하지.’ 라며 대범해질 수 있다면, 그건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는 싸움 아닐까? 메롱은 나에게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미움을 가득 싣고 걸어오는 싸움 자체를 무색하게 중화해 버리는 해독제 같은!


진짜 천진난만한 복수다! (출처: SBS 드라마_낭만닥터 김사부)


오랜만에 보는 메롱이었다. 딱히 남의 마음 상처 주는 법을 잘 몰랐던 어린아이였을 때, 못되고 얄미운 누구를 약 올리려고나 해봤을 법한 저 메롱. 나는 갑자기 욕실로 달려가서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김사부가 그랬던 것처럼 한 번 메롱을 해 보았다. 그랬더니 김사부의 그것을 보았을 때처럼 다시 한번 ‘풉’하고 만다. 그렇게 삐져나간 웃음을 통해서였을까? 순간 내 마음의 무게가 30퍼센트 정도는 헐렁해진 느낌이다. 참 신기했다. 


나는 늘 진지한 편이다. 좋게 말해서 진지한 거지, 사실은 매사에 너무 심각할 때가 많다. 내 몸을 아래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지구의 중력이라면, 내 마음을 아래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바로 저 심각함이 아닐까 싶다. 평소에는 그럭저럭 괜찮다. 그런데 살다 보면 우울한 날도 있고 불안한 날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부정적인 마음이 드는 날이면 저 심각함의 중력은 극복하기 힘든 때가 많다. 그것이 때로는 너무나 무겁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저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메롱으로부터 감정의 무게를 내려놓는 비결 하나를 얻은 것만 같다. 모든 게 너무 심각하게 느껴질 때, 누군가에게 심히 약이 오르고 심통이 날 때, 좀 정신 나간 짓 같지만 한 번씩 거울을 보면서 메롱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누구한테 대놓고 할 것도 아닌데 뭐 어때. 대신 욕실 문은 꼭 잠그고 해야지!


방어할 틈도 없이 터져 나오는 '풉' 소리는, 마치 빵빵하게 바람을 쑤셔 넣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풍선의 배꼽을 살짝 놓아주는 것 같았다. 그러자 순간 어깨에 걸려있는 부담과 긴장, 그리고 마음에 걸려있는 걱정과 미움들이 스르르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이 헐렁함이 참 좋다. 우리의 삶이 조금 더 여유롭고 아름답기 위해서는, 몸무게를 줄이는 다이어트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어쩌면 초과된 마음의 무게를 줄이는 다이어트를 종종 해줘야 하는 건가 보다. 그렇게 오늘을 조금 더 낭만적으로 살아가고 싶다. 



삶을 너무 심각하게 살지 마라. 삶은 하나의 놀이다. 

우리는 그 놀이를 웃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中  


바람 조금 빼시고, 릴렉~스 하시죠 ^^ (Photo by 파리제라늄)


세상을 향한 다정한 시선을 씁니다. 

- 파리제라늄_최서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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