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를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이 시작되던 첫날이었다. 커트 머리 청재킷의 그 아이는 내 짝꿍이었다. 서먹서먹해서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하루가 가고, 종례시간이 되어 책가방을 챙기는데 J가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 손 좀 넣어볼래?
책가방 속에서 뭔가를 만지작거리던 그 아이가 손을 슬쩍 빼면서 말했을 때, 사실 나는 좀 겁이 났다. 그래도 책가방 속에 뱀 같은 걸 넣어가지고 다니지는 않겠지 싶어 용기를 냈다. 그 순간 왜 하필 뱀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진실의 입에 손을 집어넣는 기분으로 쓰윽~ 손을 밀어 넣었다. 뭔가 물컹한 느낌! 섬찟 놀라서 나는 얼른 손을 뺐고, J는 킥킥거리며 정체모를 그것을 꺼내서 보여줬다. 그건 토끼털로 만든 새까만 귀마개였다.
J의 웃는 모습이 너무나 순수하고 청량해 보여서였을까? 나는 그날부터 J의 팬이 되었고 그 아이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여고 2학년의 날들을 무엇들로 채우며 살아왔는지 지금은 까마득히 잊어버렸지만, 그 해 여름 방학에 J와 함께 했던 시내버스 종점 여행은 아름다운 하루로 박제되어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J와 나는 다른 반으로 배정이 되어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J를 생각하며 별 모양의 금빛 펜던트가 앙증맞게 달린 예쁜 오렌지색 카드를 골랐다. 그리고 새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함께 준비했다. 그날 밤 나는 충분히 시간을 들이고, 또 충분히 정성을 들여서 카드를 썼다. 너를 정말 좋아한다고. 너와 다른 반이 되어도 여전히 네 친구이고 싶다고 우정을 맹세했다.
한 학년이 끝나는 마지막 날이라 아이들은 들떠있었고 교실은 술렁이고 있었다. 교실 뒤편에서 J를 마주하고 섰을 때, 우리 발치에서 살랑거리던 아이보리색 사물함 커튼이 지금도 발목을 간질거리는 것만 같다. 준비한 꽃과 카드를 그 아이에게 내밀며 얼마나 떨었었는지. 그렇게 긴장했던 나와는 다르게내가 내민 카드와 꽃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J는 이렇게 말했다.
야~ 나 이런 거 잘 안 어울리는 거 알잖아~
당황해서 쩔쩔매는 J의 손에 카드와 꽃을 거의 쥐어주다시피 건네고는 도망치듯 돌아섰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렇게 고3이 되었다. 우리는 다른 반이어서 자주 볼 수도 없었고, 오다가다 마주칠 때 안녕! 하는 인사도 고작 몇 번 뿐이었다. 하지만 옆 교실에 J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고3을 버텨내는 동안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J가 정말 좋았었나 보다.
섬세했던 나와는 반대로 J는 무심한 편이었다. 내가 학교를 발칵 뒤집으며 스펙터클하게 대학에 합격했을 때에도, J는 으레 그렇듯 덤덤한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네가 붙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우리는 또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아나갔다. 같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단과대학이 달라서 서로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스무 살의 청춘들은 늘 바빴고 J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거의 3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J가 보낸 엽서 한 장이 과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 지렁이 같은 글씨체를 보니 그 아이가 틀림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다.
언제쯤 마주칠 수 있을까.
엽서에 적혀있던 마지막 문장이 나를 얼마나 설레고 기쁘게 만들었는지 J한테 얘기해 준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장담하건대 J는 이런 말을 자기가 썼었는지,아니, 나에게 엽서를 보냈었다는 사실을 기억도 못할 거다. 하지만 서운하지 않다. 30년쯤 친구 하면서 이런 츤데레쯤이야 꽤 익숙해졌으니까.
물컹한 귀마개에 놀라던 날이 올 3월이면 딱 30년이 된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은 건재하다. 비록 우리가 사는 대륙은 달라도 J는 변함없는 내 베프이고, 언제나 돌아가고픈 포근한 고향이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었던 지난 30년 동안의 모든 수다들, 함께 통과해 온 모든 경험들이 아름답고 감사하다. 오늘도 여전히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앞으로도 J와 함께할 날들이 있어서 내 인생은 빛이 난다. J도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