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꿈은 다른 모양이니까
남자가 말했다. 허여멀건한 찹쌀떡같은 얼굴로 태연하게.
마주 앉아 있던 나는 물론, 주변 테이블 사람들의 흠칫 놀람과
동시에 귀가 쫑긋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미묘한 타이밍에 다 같이 대화가 잠시 끊긴 듯했다. 카페에는 나긋한 올드 재즈가 흘러나오고 창문을 둘러싼 작은 전구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성인물? 뭐 어떤 거요?"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뭐 그런 얘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받아치면서
다급하게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모금 마셨다. 그는 성인물의 다양한 종류와 스타일에 대해, 그 분야의 존경받는 거장들에 대해 한참 이야기했다.
진지하네 이 사람.
처음은 소설, 그다음은 웹툰,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상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오, 대박 콘텐츠의 바람직한 방향이네요 “
뭐라 할 말이 없어 아무 말이나 해본다.
"사실은 누구나 좋아하는 소재잖아요. 섹스."
훈훈한 남자가 그 단어를 입에 올릴 때마다 주변의 귀들이 쫑긋 대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대놓고 듣고 있는 옆 테이블 여자들은 가끔 나와 눈이 마주쳤다.
흥미롭죠. 이해합니다.
성인물 작가. 나의 호기심 전구에도 오랜만에 반짝 불이 켜졌다.
그와는 글쓰기 수업에서 만났다. 매 수업 시간마다 자기가 쓴 글을 짧게 공유하는 시간이 있다. 우리 둘 다 대단히 인상적일 것은 없는 학생들이었다. 몇 달 동안 같이 수업을 듣던 그가 쓰고 싶었던 것이 그런 것이었구나.
"혹시 습작 같은 거 있어요? 궁금한데."
"있긴 한데 아직 아무한테도 보여준 적은 없어요."
"왜요? 부끄러워서?"
"그렇다기보다는 아직 누구 보여줄 수준이 아니라서요."
궁금하다. 어떤 내용일까. 읽어보고 싶다.
"사실은 저도 야설 몇 개 써둔 거 있는데."
내가 먼저 패를 깔 수밖에.
"네? 정말요?"
"한 열 편은 될걸요. 저도 누구 보여준 적은 없어요. 그걸 누굴 보여주겠어요 “
남자의 눈이 트리 전구처럼 반짝거린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우리 교환해서 읽어볼래요?"
"아.... 음... 생각해 볼게요."
그의 물건을 손에 넣고 싶지만 내 물건을 그에게 보여주는 것은 차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노트북을 펼치고 비번을 걸어둔 폴더에서 그동안 야금야금 써놨던 나의 성인물을 읽어본다. 뜨아아아. 대화며 묘사며 정말 소름 끼치게 민망하다. 얼굴이 화끈거리는건 야해서가 아니라 너무 우스꽝스러워서다. 도저히 안 되겠다. 이건 평생 이불킥 각이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카톡을 보냈다
- 아무래도 안될 것 같은데요 ㅋㅋㅋㅋ
- 왜요. 같이 탈고할 때까지 응원합시다!
하아… 이 요망한 남자가 뭘 써놨을지 너무 궁금하긴 한데 나는 보여주지는 못할 것 같다.
급하게 나의 작품을 덜 부끄럽게 퇴고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딱히 만질만한 구석이 없을 정도로 빈약하다. 야한 장면을 글로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고 막상 써보면 나의 표현력이 겨우 이정도밖에 안되나, 혹은 이렇게 자기 검열이 심해서 뭘 쓰겠어 하는 생각에 부딪히고 만다.
어제 임경선 작가의 신작 소설 <다 하지 못한 말>을 읽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대한민국에서 성애 장면을 가장 노골적으로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작가'라고 평했다는데 작가 스스로도 그 타이틀을 싫어하는 것 같지 않다. 하루키 키즈인 그녀와 우리에게 담담한 하루키의 소설 속에 이스터에그처럼 깜짝 등장하던 적나라한 섹스 신들. 청소년기의 우리에게 그게 얼마나 눈이 번쩍할만큼 짜릿했었나.
섹스를 글로 쓰는 것은 전혀 쉽지 않다. 폄하는 커녕 그 행위를 의성어와 의태어 없이 세세하게 그것도 문학적으로 묘사하고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써봐야 안다.
나의 글쓰기 친구가 감춰둔 성인물을 읽어보려던 욕심은 버리기로 했다. 그가 언젠가 정식으로 연재라도 하면 결제하고 몰래 읽어야지. 그나저나 우리는 언제쯤 끝을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