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가르쳐준, 숫자보다 중요한 우리의 태도
발리 여행을 하며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이 2가지다.
1. 몇 살이냐
2. 결혼은 했냐 →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boyfriend에 대해 꼭 물어본다.
왠지 나이가 적어 보이진 않는 동양인 여자가 혼자 돌아다니다 보니 더 궁금했던 모양이다.
발리 사람들은 보통 이십대 중반이면 결혼을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옛날 모습처럼 일정 나이까지 결혼을 못하면 조금은 이상하게 보는 시선도 있는 듯했다.
사실 한국은 요즘에 늦게까지 결혼을 안 한 사람도 많고, 나이나 결혼 이야기를 함부로 묻는 것이 무례하다는 인식이 강해져, 초면에 그런 질문을 하는 일이 많이 줄었다. 그래서인지 발리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질문들이 처음엔 꽤나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잊고 있던 나의 ‘나이’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됐다.
어느덧 혼자 여행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대학교 3학년 때 유럽에 교환학생을 간 뒤로 혼자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으니, 그게 벌써 10년 전이다.
그동안 여행지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나이를 말할 때마다 거리낌이 없었다.
22살, 26살, 27살, 29살.. 그리고 이젠 그 나이들을 뛰어넘어 발리 사람들이 약간 놀라는 33이 됐다.(요즘엔 꼭 만 나이를 고수한다)
난 여전히 어리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반응들에 왠지 모르게 나이를 말할 때 수줍어졌다.
그러다 문득 포르투 와이너리 투어에서 만났던, 뮬란 같지만 그보다 훨씬 더 이뻤던, 미소가 아름다운 일본계 브라질리언 언니가 생각났다.
26살, 첫 회사를 퇴사하고 유럽으로 한 달간 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늦은 오후, 포르투 시내 호스텔에서 신청한 와이너리 투어를 떠났다. 가이드는 우리 호스텔에서 참가자들을 먼저 픽업한 뒤, 시작 장소인 강변까지 가는 길에 다른 호텔에 들러 참가자들을 추가로 픽업했다. 그 호텔 로비에서 시끌벅적한 세 명의 브라질 여자들이 등장했는데, 뮬란언니는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동양인의 얼굴이었다. 조막만 한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 검은 긴 생머리, 구릿빛 피부와 늘씬한 팔다리는 평범한 동양인이었던 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일본계 브라질리언이었던 그녀는 유독 쾌활하고 잘 웃었고, 밝고 시끄러웠다. 미국이나 유럽의 교포는 많이 봤지만, 브라질의 동양인은 처음이라 더욱 신기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엄청나게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투어가 끝난 뒤 우리는 포르투의 밤거리로 나와 와인을 더 마셨다. 장소를 몇 번이나 옮기며 떠들던 중, 누군가 나이 얘기를 꺼냈다.
사실 그 무리에서 나이를 가장 궁금해했던 건 가장 어렸던 스무 살 미국인 남자애였다.
서양인들이 동양인의 나이를 어리게 보는 건 흔한 일이어서 내 나이를 듣고 그 친구는 놀랐다. 하지만 정작 내가 정말 놀랐던 건 브라질 언니들의 나이를 들었을 때였다.
당시 나는 만 25살이었고, 다른 친구들도 전부 20대 초중반이었는데, 그 언니들은 34살이었기 때문이다. 시끄럽게 웃고 장난치며 어린 친구들과 이질감 없이 어울리던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모습은 전혀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보다 더 생기 있고 자유로웠다. 내게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처음으로 알려준 순간이었다.
괜스레 내 나이가 신경이 쓰일 땐, 그 쾌활했던 브라질 언니들을 떠올린다. 나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웃고 떠들며 어린 친구들과 이질감 없이 놀던 그녀들은, 숫자로만 보면 나보다 많았지만, 태도는 오히려 나보다 더 자유롭고 젊었다.
여행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라이프스타일을 만날 때마다, 한국에서 비슷한 나이에 비슷하게 사는 삶만 볼 때보다 내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지는 걸 느낀다.
결국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를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라는 걸 알게 되는 듯하다.
그 언니들을 떠올린 후 발리에서 내 나이를 들은 상대방의 리액션에 조금 수줍어졌던 나를 반성했다.
내가 마흔이 되든, 예순이 되든 혼자서 즐겁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젠가 누군가 나를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면 좋겠다. '나도 저 나이에, 저렇게 멋지고 자유롭게 살아야지!'
마치 그때의 내가 브라질 언니를 보고 느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