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보수주의자라면 심장이 없는 사람이고, 늙어서 진보주의자라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윈스턴 처칠이 말했다고도 하고, 칼 포퍼의 말이라고도 하지만, 인용문 원전을 찾다 보니 그렇지 않았다.
1923년 월스트리트 저널 기사에 따르면 스웨덴 국왕 오스카르 2세의 "25세에 사회주의자가 되어 보지 않은 자는 심장이 없고, 25세 이후에도 사회주의자로 남는다면 머리가 없다.”가 공식적인 기록이다.
최영미 시인의 시는 명징하다. 얼마 전 시집 『돼지들에게』를 출간했다. '돼지'의 어감은 탐욕스럽고, 주는 대로 받아먹는 게으른 존재다. 일찌감치 그녀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통해 '운동보다는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을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아파했다. 그리고 마침내 진보의 거짓 탈을 벗기고야 만다.
세상을 정의롭게 만든다는 '당연한 일'을 하면서 화려한 말만 내뱉고, 경력을 포장하고, 왕관을 쓰고, 진주를 탐하는 천박한 돼지와도 같은 행태는 비유적이지만 직관으로 다가온다. 모두들 자기를 알리는데 급급하고 난리다.
공지영 작가의 글을 기억한다. 그녀는 "인간은 변하지 않아요. 만일 변한 친구가 있다면 우리가 어려서 그를 잘못 본 거예요."라고 소설 『해리』에 썼다. 절대 바뀌지 않고 고쳐 쓸 수 없다는 인간 본성을 간파했다. 해리는 한 여성의 이름이지만,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적 자기 방어 행위인 '해리(解離) 현상'을 중의 표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보수는 느리고 진보는 빠르다고 한다. 처방 시의 영역을 개척한 에리히 케스트너는 '진보의 유래'를 "두 점을 가장 짧게 연결하는 우회로를 찾은 것"에 두었다. 가장 짧은 우회로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급히 이뤘던 그래서 감출 것도 많은 진보의 맹점을 지적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말 또한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통용하기 어렵다. 보수와 보수 아닌 것, 진보와 위장된 진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란 너무 힘들다. 허영과 탐욕과 허세가 판치는, 화려하고 그럴싸한 포장지만 마구 팔리는 시대다.
젊은 세대들의 보수화 경향을 탓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이미 가진 기성세대로서 미안한 마음에 위로의 마음을가지다가도 깜짝 놀란다. 혹시 너무 풍요로워 지킬 것이 많아서가 아닐까 의심하는 모습이 섬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