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의 첫날, 집 근처 피아노 학원에서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환상곡 F단조를 연습하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몇 년 전부터 이 곡을 누군가와 듀엣으로 연주해보고 싶었는데, 올해는 그 목표를 한 번 달성해보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3월 초엔 임동혁, 임동민 피아니스트가 듀오 리사이틀에서 이 곡을 연주한다는 소식에 엄마와 함께 가려고 티켓을 예매했고,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나름 피아노 연습을 열심히 한 터라 마음속으로 멜로디를 흥얼대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 앞까지 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빠로부터의 전화였다. 평소에도 아빠는 타지에 살고 있는 나에게 자주 전화를 하셨기에 그날도 별 다를 것이 없는 안부 전화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전화를 받기전까지만 해도 나의 2021년이 이토록 슬픈 해가 되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평소 조그만 것에도 깜짝깜짝 잘 놀라는 나여서였을까? 뜬금없이 아빠가 너무 놀라지 말고 들으라고 하셨다.
“엄마가 어제 뇌출혈로 쓰러졌다.”
아빠가 이 말씀을 시작으로 엄마가 어떻게 쓰러져서 발견되셨는지, 병원에 이송되셨는지 등등의 말씀들을 하셨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뇌출혈? 뇌에 출혈? 드라마에서나 듣던 그런 병이다. 우리 엄마가 그렇게 쓰러지실 리가 없는데.. 30년이란 인생을 살면서 머리가 하얘진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그 순간 처음 느꼈다. 내 머릿속에서 ‘뇌출혈’이란 단어가 이명처럼 수십 차례 들렸고,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뛰었다.
엄마는 내가 7살 즈음하여 만성 신부전증을 앓게 되셨고, 복막투석을 시작하셨다. 엄마의 행운이었을까, 아빠의 수고로움 덕분이었을까. 엄마는 운 좋게도 발병한 지 1년 후인 1998년도에 신장 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으셨고, 수술 후에도 거부반응이 없어 회복하는 데 문제가 없으셨다. 이런 대수술을 받으시고도 엄마는 본인의 피아노 학원 운영을 여김 없이 잘 해내셨고,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엄마 역할에도 누구보다 열심이셨다.
엄마가 남들보다 신체적으로 조금 약한 사람이란 사실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집에서 직접 복막투석을 하시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많은 양의 약들을 드셨기에 어린 나이에도 그런 생각이 충분히 들었다. 하지만 나도 나이가 들면서 돌이켜보니 엄마는 보통 사람들보다 건강에 있어 큰 약점을 갖고 계신 분이셨다.
원체 독립적인 성격을 갖고 계시고, 본인의 일이나 취미에 항상 열정적이신 분이셔서 그랬을까? 가끔은 엄마가 과도하게 일을 하셔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엄마가 아프단 사실은 잊고 살아왔다. 아빠가 식탁에서 가끔씩 권하셨던 회나 육회와 같은 날 음식들을 거절하셨고, 소식하시며 식단 관리를 하시는 것 말곤 엄마가 보통의 사람들과 특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2018년, 엄마가 신장 이식을 받으신 지 20년째 되던 해였다. 더 이상 엄마가 쓰시던 신장이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해 여름, 엄마는 다시 투석을 하시게 되었다. 뱃속의 관을 통해 몸 안의 노폐물을 제거하는 복막 투석을 매일 밤마다 하셨다. 아무래도 투석을 다시 시작하시면서 몸이 많이 힘들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복막 투석을 시작하시고 2년 6개월 후, 엄마 뇌 속의 혈관들은 버티지 못한 채 터져버리고 말았다.
엄마가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시는 동안 나는 타지에서 나 먹고살기가 바쁘단 핑계로 엄마의 건강 상태에 충분히 신경 쓰지 못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내가 무심한 딸이란 걸 처절히 깨달았다.
엄마가 혈관질환을 겪게 될 확률이 남들보다 높다는 것을 왜 미처 생각 못했을까? 좀 더 세밀하게 건강검진을 같이 받아볼 생각은 왜 못했을까? 걸음이 빨랐던 엄마였는데, 나들이를 가셨을 때 느려진 발걸음을 왜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한 번만 더 생각했더라면 이런 날이 오지 않았을까? 원래 엄마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그날 밤새 내도록 끝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