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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노신 Mar 29. 2021

치즈 함박 스테이크에 눈물 흘린 사연

포기 할 수 없는 나만의 마시멜로우

불만족스러운 현실에도 씩씩히 살아가며 우리는 매일의 마시멜로우를 찾는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퇴근 후 맥주 한 잔이 될 수도 있고, 주말에 업로드되는 넷플릭스 한편, '덕질'하는 아이돌의 새로운 콘텐츠, 금요일 밤 친구와의 약속일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힘들고 지루한 일상을 견디게 하는 자신만의 보상이 있고 그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당장의 욕구를 잠시 미뤄둔 채 하기 싫은 일을 견딘다.

나에게는 요즘 하루 두 끼의 밥상이 나만의 '마시멜로우'다.




2월 말 공식적으로 두 번째 퇴사를 하고, 불안한 마음에 다시 잠깐 일자리를 찾았다가 '화들짝' 놀라 일주일 만에 그만둔 후 진지하게 공부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코로나 시국에 도서관이나 스터디 카페를 찾기도 불편하여 집에서 공부를 하는데, 문제는 자고-일어나서-먹고-공부하는 모든 일과가 집에서만 이루어지다 보니 이따금 가슴이 체한 듯 답답해 온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바깥 활동을 하자니 귀찮고 피곤한 것도 사실이라 주 3회 운동할 때만 빼고는 거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단조로운 일상에 따라 에너지도 다운이 되어 요즘은 무엇에도 큰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단지 하루 두 끼 식사를 ‘어떻게 먹을까'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이자 유일한 오락거리이다.

잠들기 전에 쿠팡 앱에 접속하여 먹거리를 주문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도착한 식재료로 맛있는 점심을 차려먹을 생각을 하면..! 새로운 하루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서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잠들 수가 있는 것이다.



지난 목요일, 주중을 지나며 '보상 욕구'는 고조되고 있었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눈을 반짝이며 마켓을 둘러보기 시작하는데 '치즈 함박 스테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몇 주 전에도 마트에 갔을 때 집어 들었다 놓았다 하며 망설였던 제품이었는데, 이제는 먹을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어 과감히 장바구니에 넣었다.

같이 곁들여 먹으면 좋을 채소 몇 가지와 거의 항상 구비하는 버섯, 양파를 추가로 담고 결제를 완료했다. 그리곤 내일 아침 7시 전 도착 예정이라는 문구를 보며 뿌듯하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문 앞에는 신선한 식재료들이 잠에서 깬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잠시 흐뭇한 눈인사를 나누었다.

좋아, 잘 도착했구나. 오늘 점심으로 맛있게 먹어주마.

이렇게 행복감에 젖어있던 그때에 나는 실수를 하고 만다.

쿠팡맨이 정성스레 가져다준 프레시백의 내용물을 확인만 하고 그대로 넣어둔 채 문을 닫은 것이다.


왜 그랬냐고? ..이유는 단순했다. 냉동실에 치즈 함박 스테이크를 넣을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취생이라면 많이들 공감하겠지만, 냉동실에는 항상 자리가 없는 법이다.

1인 가구의 특성상 식재료를 사면 남을 때가 많아 종종 손질되어 냉동고에서 순서를 기다리게 된다.

게다가 지난달에 엄마가 부쳐준 육개장과 카레도 한자리를 차지하여 제 아무리 앙증맞은 치즈 함박 스테이크 세 덩이이지만 비집고 들어갈 틈이 부족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이스팩에 싸여 잘 포장된 그것을 서늘한 복도에 몇 시간 더 방치한 뒤 12시에 꺼내오자. 그리고 요리를 해서 먹고, 남은 것은 어떻게든 요리조리 잘 넣어보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안일하게, 내 하루의 유일한 즐거움을 복도에 내버려 둔 것이다.




책상에 앉아 오전 일과를 보내고 있는데 오전 11시쯤 문 앞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복도를 지나가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순간 귀를 쫑긋 세웠다가 혹시나 하는 불길한 예감에 문 밖을 살그머니 내다보니 이럴 수가.. 내 점심거리가 든 프레시백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었다.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로켓 프레시 배송의 한 가지 선택사항인 '프레시백' 포장은 재사용이 가능한 바구니에 상품을 배송하고, 다음 배송이 있을 때 다시 수거를 해 가는데 오늘은 같은 층 다른 호수에 배송이 또 있었던 것인지(!) 쿠팡맨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내 문 앞의 프레시백을 치워준 것이었다.

내 배송 상품이 그대로 들어있는 채로 말이다.


당황한 나는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고 상담직원의 안타까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오늘 저녁에라도 '치즈 함박 스테이크'를 먹을 수만 있으면 되었다.

상담원은 거듭 죄송하다고 말하며 오늘 오후에 다시 받아볼 수 있도록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난 마음을 차분히 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저녁시간이 되도록 상품이 도착하지 않았고, 다시 연락한 결과 "해당 제품이 품절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왜 나는 그아이를 꺼내 두지 않았을까?

왜 평소 미리 냉동고를 정리하지 않았나?

왜 프레시백을 현관까지라도 들여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자책이 밀려왔다.


결국 나는 상품을 취소하고, 이와 같은 불상사의 발단이 된 꽉 찬 냉동고를 비울 겸 얼린 육개장 하나를 해동하여 저녁을 먹었다.

물론 맛있었지만, 어젯밤 잠들기 전부터 상상하고 기대한 바로 그것을 먹지 못했다는 실망감을 지울수는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좀처럼 의욕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이 축 처져 있었다.


'아... 도대체 그게 뭐라고.'



밤이 되어 잠들기 전 남자친구와 통화를 했다.

기분이 울적해 있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서 사연을 이야기하다가 서러움이 울컥 밀려와 급기야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고작 치즈 함박 스테이크 일지도 모르지만.. 나한테는 그게 아닌데."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두고 싶고, 쉬고 싶고, 아무쪼록 뭐가 됐든 '공부가 아닌' 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이런저런 유혹을 참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뿐인 즐거움을 허무하게 날려버린 속상함이 생각보다 컸다.


남자친구는 나를 달래며 "치즈 함박 스테이크 내가 사줄까?"하고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지금은 그걸 먹고 싶지가 않아."

(치즈 함박 스테이크한테 삐졌음)


그렇게 나는 이틀 정도를 식도락에 대한 의욕을 잃은 채 무미건조하게  보냈다.




그리고 맞이한 토요일,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가 종합 쇼핑몰을 지나게 되었다.

지나치려는 찰나 잊고 있었던 해묵은 소망이 고개를 쏘옥 내밀었다.


"그거.. 있는지 한번 볼까?"


남자친구는 낄낄 웃으며 나를 놀렸고 나는 마음이 다 풀린건 아니었지만 다시금 희미한 설렘을 느끼며 '그것'을 찾았다. 마침내 발견했을 때에는 슬며시 웃음도 나왔다.

그렇게 돌고 돌아 드디어 나의 집에 도착한 치즈 함박 스테이크. (의욕을 잃은 며칠간 냉동고의 재료들로 끼니를 해결한 덕분에 공간도 넉넉히 생겼다)


처음 주문하던 그날 밤 상상하던 그림 그대로 계란, 버섯, 토마토를 곁들여 조리한 후 식탁에 놓고 보니 제법 근사하다.

며칠 늦어지긴 했지만 역시 확실한 보상이었다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입 크기로 잘라 맛을 보았다. 지난 며칠간의 여러 감정이 응축된 그 맛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그래, 이것 때문에 참고 견디는 거지.'


그렇게 나는 다시 식사에 대한 의욕과 열정을 회복하고 있다.




때로 우리는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

그 대상 자체가 중요하기보다는, 그에 부여한 각자의 개인적인 '의미' 때문이다.

특별한 의미가 더해져 나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사물은 그 관계성 때문에 소중해지며, 그렇기에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는 하찮은 것일지라도 나에게는 다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무엇이 된다.


지난주 나를 울고 웃게 한 치즈 함박 스테이크는 인내심을 하루하루 쌓아 올려야만 성취할 수 있었던 나만의 보상이었다. 바보같은 실수로 허무하게 잃어버린 채 눈물마저 흘려야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이렇게나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일상이 남아 있어 감사하기도 한 사건이다.




교훈 : 냉동고 정리는 미리미리 하자.

P.S. 늘 애써주시는 쿠팡맨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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