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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도서관에서는 주인의식이 없는 편이 좋다

- (ft. 『있기 힘든 사람들』)

by 은작


같은 자리를 맴돌 때에는 가치가 있었던 '그저, 있을, 뿐'도 잘게 나뉘면 너무나도 확실하게 가치 없는 것이 된다. 맥락을 잃은 '그저, 있을, 뿐'은 기괴할 만큼 무의미하게 보인다. 그 결과 우리의 '있기'를 위한 곳은 사라진다.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이야말로 삶이 버거운 우리에게 은신처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곳에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 그렇게 '그저, 있을, 뿐'은 뼈만 앙상하게 남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허무주의가 싹튼다. '그저, 있을, 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돌봄의 뿌리에 있는 '있기'가 시장의 논리 때문에 타락한다.
허무주의가 싹튼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찾은 진범의 정체다.

우리는 지금 투명한 빛이 가득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런 현실을 돌봄 시설에서 깨달았다. 투명한 빛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어떻게든 '있기'를 밑받침하려 애쓰는 사람들과 함께 일했고, 결국에는 패배했다. 허무주의는 외부에서 우리를 덮쳤고, 내부에서 우리를 물어뜯었다.
그래서 그저 있기란 힘든 것이다.

- 도하타 가이타 『있기 힘든 사람들』 (다다서재, 2025 개정판 1쇄)




200명 가까이 있는 단체방에 엉겁결에 속하게 되었다. 좋은 취지로 만들어지는 협동조합이라 했고, 인원수가 중요하다고 했다. 나와 아이들 이름으로 조합비를 내며 참여했다. 곧 창단이었다. 총회를 준비하던 어느 날, 그림 두 장이 올라왔다. 그 중 하나가 아래다. 제목은 ‘무임승차 빌런’. 아래에는 해시태그도 달려있다. '#맞는_소리 #쳐_맞는_소리'.

음... 보는 순간 마음이 조금 복잡해진다.


올라왔던 이미지 중 하나다. 이해는 된다. 정말. 그러나, 다른 이야기도 하고 싶다.


물론 이해도 됐다. 말이 쉬워 ‘창단’이지, 실제 준비 과정은 얼마나 복잡할까 힘들까? 생각만 해도 버겁다. 당연히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도 일렁일 것이다. 그 마음도 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물론 창단 같은 어머어마한 일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마을 도서관 관장 일을 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나도 저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목탁을 두드리며(<어쩌다 관장 1> 1화 참조) '아니, 나만 왜? 왜? 왜!!!" 하고 (속으로) 소리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마음이 드는 것과 그 마음을 바로 표현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 내가 특별히 도량이 넓어서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기적이라서 그렇다. 누가 더 하고, 덜 하는 일을 경쟁처럼 언어화하면, 공동체는 금방 부채감으로 가득한 공간이 된다. 지속성이 필요한 곳에서는 위험한 방식이다. 월급 받고 일하는 곳도 아닌데, 불편한 마음을 안고 해야 한다면 누가 나오겠는가?


도서관 책 몇 권에 가을 낙엽을 넣어두었다. 빌린 사람들에게 우연한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우리 마을 도서관은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열려있다. 실제 자원봉사자가 있는 시간은 1시에서 5시뿐이다. 한 달에 네 시간 정도 되는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들로 운영되지만, 그마저도 다 채우지 못하는 날이 많다. 예전에는 봉사자가 없으면 도서관 문을 열 수 없었다. 운영시간임에도 문이 닫혀 있는 날이 많았다. 또, 오전이나 저녁에만 마을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서관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무인 운영을 도입한 뒤는 달라졌다. 봉사자 없이도 도서관은 열려있다. 오는 사람은 무인대출 용지에 이름을 적고 책을 빌린다. 반납은 함에 넣으면 된다. 자원봉사자가 도서관에 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전산으로 대출 처리를 하고, 반납된 책을 확인하는 일이다. 나는 이 방식이 일종의 ‘신뢰 실험’처럼 느껴진다. 아주 작은 규모지만, 꽤 아름다운 실험이다.

무인 운영 도입 당시, 우려도 많았다. 책이 사라지면 어떡하냐, 아이들이 숨어서 나쁜 짓(?)이라도 하면 어떡하냐, 물건이 부서지거나 하면 어떡하냐 하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하지만 곧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책은 원래 사라질 수 있다. 그것은 ‘어쩌다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언젠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인생사가 대부분 그렇지 않은가? 사실 큰일도 아니다. 책이 사라지면 다시 사면되고, 아이들끼리 이용하지 않도록 규칙을 세우고, 어른들이 오며 가며 공간을 살피면 된다. 실제로 지금까지 대부분의 우려는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책 분실도 무인 운영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실수로 찢거나 낙서해서 미안하다며, 새 책을 들고 오는 마을 사람들이 오히려 늘었다. 반면, 무인 운영의 장점은 분명하다. 자원봉사자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고, 이용자도 덜 미안하다. 문턱이 낮아졌다. 도서관에 더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오게 되었다.


지금은 간판이 달렸는데, 간판을 달기 전 마을 도서관의 밤풍경. 옆 쪽에 건물이 하나 더 붙어있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좋은 취지로 모인다. 그러나 지속되다 보면 ‘누가 더 열심히 했는가’를 두고 묘한 체급 싸움이 벌어지기 쉽다. 당연하게도 모든 단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것이 딱딱 나눠지지 않는다. 더 한 사람은 더 해서 서운해지고, 덜 한 사람은 덜 해서 미안해진다. 이 둘이 뒤섞이면 ‘과열된 주인 의식’이 탄생한다. 기묘하고 비효율적이다. 나 역시 여러 공동체를 거치며 이 '기묘하고 비효율적인 시간'을 통과한 경험이 있다. 서로를 '빌런'이라고 칭하다 보면, 감정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정말 돌아오기 어렵다. 감정싸움의 고속도로를 타기 전에, 멈추는 것이 좋다.

사실 조금만 떨어져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공동체는, 그리고 인생은 그렇게 계산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지금 못하지만, 다음에는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때는 영영 못할 수도 있다. 누군가 지금 조금 더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나중에 갚고 싶다면 갚으면 되고, 굳이 여기서 이 사람에게 갚을 필요도 없다. 세상은 넓고, 갚을 일은 많다. 연대는 느슨할 때 오래간다.

그래서 나는 마을 도서관에는 ‘무임승차하는 사람’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와서 책 한 권 들춰보고 가는 사람, 따뜻한 온기에 쉬다 가는 사람, 그냥 멍하니 있다 가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면 좋겠다. 그런 사람들이 많을수록 마을은 숨을 튼다. 물론 이곳은 카페가 아니니 맞춤형 서비스는 없다. 불편하기도 하다. 그러나 기대로부터 조금 멀어지는 순간 도서관은 누구에게나 열린다. 공동체는 원래 그 정도의 느슨함을 견디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 책 참 괜찮다. 우리 마을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 역시, 마을도서관이 참 좋다!
요새 이런 표지가 트렌드인가. 디자인이나 색감이 너무 비슷해서 찍어보았다.


『있기 힘든 사람들』에서 저자는 '그저 있기'가 얼마나 힘든지, 책 한 권에 걸쳐 쓴다. 힘 빼기의 기술이 무엇인지, 그것을 일상에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보여준다. 이 책의 부제는 '돌봄, 의존 그리고 지켜야 할 우리의 일상에 대하여'다. 저자는 맛깔난 문장들 (살짝 투박하기도 하고, 논리가 반복되기도 하지만, 정말 글쓴이의 감정선이 살아있어서 읽는 맛이 있다)로, 생생하게 자신의 경험을 직조해 낸다. 독자는 이 책을 읽다 보면 느끼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의 뿌리에 있는 '있기'의 가치가 얼마나 폄하되고, 물어뜯기는지.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맞다.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마을 도서관에서 이 '있기'를 한번 연습해 보면 좋겠다. 다른 사람에게 좀 이유 없이 기대 보는 연습도 하고, 빈자리에 그냥 앉아보는 시간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러다 여백이 채워지면, 내가 여유가 생기면 작게 갚아나가기도 하는 경험을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


내가 존경하는 우치다 다쓰루 선생님은 말했다.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라고, 그래서 나도 한번 따라 말해본다.

'마을도서관에는 주인 의식이 없는 편이 좋다'.

마을도서관으로 가자. 그리고 당당하게 '빌런'이 되어 보자. 물론 너무 자주는 말고, 가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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