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훔쳐본 엄마의 일기장 속 문장
2022년이라고 적힌 하늘색 표지의 다이어리. 열어보니 종이가 얼룩덜룩하다. 색이나 부푼 정도가 커피는 아닌 듯하다. 오미자차일까. 일기 시작은 1월 1일. 그리고 끝은 12월 31일.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2026년 1월 1일. 음력 엄마 생일이다. 오랜만에 대구로 가족들이 모였다. 부득이하게 빠진 큰언니 가족을 제외해도 14명. 많다. 많아. 한정식집에서 식사를 하고 근처 카페로 갔다. 엄마는 쓸데없이 돈 쓴다고 얼굴을 막 구겼다. 3층에는 우리만 있었다. 배경이 이쁘고 넓어서, 핸드폰을 벽에 세워두고 즉석 가족사진도 찍었다. 남편이 타이머 설정을 잘 못해서 모두가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 한 곳을 보며 웃으니 참 좋았다.
시간이 저녁 9시였는데, 어쩐지 부드러운 커피가 먹고 싶었다. 오늘 낮에 커피를 1잔만 먹었으니 (평소 2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시나몬 카페 모카는 예상대로 부드러웠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안 괜찮았다. 아침부터 짐을 싸서 대구까지 내려오느라 몸이 너무 피곤했는데, 정신이 (기분 나쁘게) 말똥말똥했다. 누워서 가져온 책을 봤다. 『편안함의 습격』. 술술 잘 읽힌다. 재미있다. 그러나 너무 찔린다. 아, 편안함의 찌든 나의 나태함을 이 밤에 잠 못 들고 마주하니 더 피곤하다. 새벽 2시다. 눈에 핏발이 선다. 눈을 감자.
이럴 때 내가 듣는 게 있다. <잠 못 이룬 그대에게>라는 팟빵이다. 목소리가 어찌나 달콤한지. 잠을 못 자더라도, 듣다 보면 기분이 몽실해진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잘 잠든다. 무선 이어폰을 꺼내고 충전기에 꽂아 둔 핸드폰을 가지러 가다가,
딱! 이 하늘색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2022년, 엄마의 일기(혹은 일지)에는 불교 진언이 빠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잠 못 이룬 밤' 쪼그리고 앉아 엄마의 일기를 다 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글씨로 만나는 엄마는 낯설고 신기했다. 생각보다 모임도 많고, 커피도 자주 마셨다('커피 한잔 하고~'라고 자주 등장). 나의 딸이 반장이 됐다는 메모도 적혀있고, 동생 임신 소식에 극강의 환희를 보이기도. 가장 많은 건 건강 정보과 불교 법문이다. "몸이 너무 아파 진통제 먹고"란 문장에서 눈물이 나다가 "갱연기"란 글자 앞에서 미소 짓는다. 글을 읽다가 자꾸 기도하는 마음이 든다. 엄마가 쓴 문장 그대로 "큰 도는 눈앞에 있다."
당연하게도 엄마에게는 아는 척하지 않았다(딸이 내 일기를 읽는다는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딸아, 혹시 이 (공개된) 블로그 글을 보고 있다면 당장 나가라!!). 대신 다짐했다. 나도 글을 써야지. 매일 일기를 써야지. 엄마처럼.
그래서 다이어리를 폈다. 어쩐지 방송작가 협회에서 받은 다이어리를 가져오고 싶더라. 매년 받긴 하는데, 매년 다 쓴 적은 없다. 일단 무겁다. 잘 안 가지고 다니게 된다. 근데 일기장이라면, 무거워도 상관없지. 거창한 일기 말고, 메모하듯 그날의 단상을 써야지. 손으로. 나도 엄마처럼, 필사도 하고 좋았던 순간들을 툭, 툭 담아야지.
새해 첫날.
엄마에게 받은 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