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통과한 우리에게

- 1면에 오르지 않은 이야기

by 은작

0.

매달 <한 편의 맛>이란 주제로 음식 영화와 관련된 짧은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1월은 일본, 2월은 한국 영화였다. 나름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 서양 영화를 찾았다. <바베트의 만찬> 같은 고전 영화를 하고 싶었는데, 찾기가 어려웠다. 어렵게 어둠의 경로로 다운로드하였는데 플레이가 잘 안 됐다. 뭔가 호환이 잘 안 맞는 것 같았다. 결국 ott를 뒤졌다. 그 옛날 <시네마천국>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하고 쳐내면서 보던 시절. 오가던 지하철에서 3배속으로 영화를 보며, 원고를 쓰던 시절.


아무튼, 이 과정을 거쳐 <논나>(넷플릭스)를 봤다. 영화 자체는 클리셰 범벅이고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지만,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 힘이 실렸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영화의 완성도가 아니라, 영화로 본 나의 세계니까. 3월의 칼럼을 여기에 옮겨본다.

아래가 짧은 칼럼이다.




한동안 종이 신문을 구독했다. 알고리즘이 내 세계를 너무 좁게 가두는 것 같아서다. 검색은 늘 아는 범위 안에서만 맴돌고, 화면에 뜨는 것들은 취향에 맞춰 정교하게 정렬된다. 신문은 다르다. 종이를 넘기다 보면 내가 전혀 몰랐던 세계와 우연히 마주친다. 자연스레 나의 무지를 깨닫고 몸을 낮추게 된다. 도서관이나 서점이 주는 미덕과도 비슷하다.

현관에서 신문을 가져와 커피를 내리고, 종이를 펼치며 맞는 아침은 든든하다. 사각거리는 종이 결을 타고 광활한 세계를 탐험한다. 시선은 지면 구석 단신 기사들에 오래 머문다. 열 번의 검정고시 끝에 아흔 살에 대학생이 된 할머니의 기사(25면)에 감탄하고, 맨몸 운동의 장단점을 읽으며(19면) 날로 붙는 뱃살을 줄여보리라 다짐한다. 1면에 실린 대단한 사건은 아니지만, 나는 이런 이야기에 마음이 간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건, 어쩌면 이처럼 대단하지 않아서 더 대단한 이야기들일지도 모른다.


영화 <논나>(스티븐 셔보스키 감독, 2025) 속 이야기는 틀만 보면 낯설지 않다. 어머니를 여의고 가족의 식탁을 그리워하던 존이 ‘논나’(이탈리아어로 할머니) 셰프들이 요리하는 가정식 식당을 여는 과정이다. 개업부터 운영까지 쉬운 일 하나 없지만, 진심을 담아 결국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 흔한 영화 속 서사처럼 보이는 성공담이 더 큰 묵직함으로 다가오는 건, 말미에 나오는 실제 사진들의 힘이다. 단순한 허구가 아닌 진짜 삶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라는 사실이 울림을 더한다.

이 식당은 미슐랭 스타나 화려한 플레이팅을 지향하지 않는다. 대신 할머니들의 손맛을 통해 가족의 온기를 나누려 한다. 손님을 가족처럼 환대하고, ‘식탁 앞에서는 늙지 않는다’라는 논나의 말을 음식을 통해 다정하게 건넬 뿐이다.


방송작가로 일하는 동안 나는 늘 화제성과 시의성을 좇았다. 같은 이야기라도 더 자극적으로 풀어야 했고, 매 순간 방송에 나올 만한 가치가 있는지 가늠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음 한구석이 공허해졌다. 세상에는 1면에 실리는 거창한 사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19면, 25면에 실릴 법한 이야기들에 마음이 기울었다. 일상의 작고 반짝이는 것들, 그 소박한 기록들이 결국 내가 이야기를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다. 골목과 마을을 누비며 평범한 이들의 목소리를 인터뷰하고 글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영화 <논나>는 작은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의 가치를 보여준다. 사실 논나들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병마와 싸워야 했고, 가족과 멀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정체성을 부정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냈다. 가족을 먹이기 위해, 슬픔을 삼키기 위해, 오늘 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불 앞에 섰다. 그래서 그들의 음식에는 레시피보다 훨씬 긴 인고의 시간이 들어 있다.

우리의 인생도 논나들과 다르지 않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돌아보면 그저 견뎌온 날들도 많다. 영화 <논나>는 그 고단함을 억지로 미화하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식탁을 차리는 사람들의 저력을 보여줄 뿐이다. 1면에 실리지 않아도 누군가의 하루를 지탱하는, 작아서 더 큰 이야기 속에 진짜 삶의 진실이 숨어 있다. 영화 <논나>가 건네는 위로는 분명하다. 거창한 성공이 없어도, 당신이 차려낸 오늘의 식탁과 당신이 통과해 온 오늘의 시간은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한 기록이라는 것. 오늘도 누군가는 신문 뒷면을 넘기며, 또 누군가는 정성껏 식탁을 차리며 각자의 생을 통과하고 있을 것이다. 1면에 실리지 않아도 충분히 눈부신, 각자의 이야기를 품은 채로 말이다.


*


영화 논나.jpg


일요일 연재
이전 06화큰 도는 눈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