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고파서(왔어)"

- 알싸한 희망의 맛, 그건 봄의 맛.

by 은작

일요일 저녁은 분주하다. 기숙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학교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방학인데도 학교에 남아 계절 학기를 듣고, 자습도 한다. 아이는 여행용 캐리어를 가지고 다닌다. 옷가지, 비타민, 간식 사이로 문제집이 여러 권 보인다. 집에 올 때부터, 돌아갈 때까지 한 번도 펼쳐지지 않은 채 자리만 지키고 있다. 책가방 안에도 비슷한 책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보지도 않을 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무겁게 다니냐고 묻자, 아이는 ‘혹시나’ 볼 일이 생길까 봐 들고 왔다고 한다. 가방을 들어보니 나도 모르게 ‘헉’하고 숨이 튀어나온다. 빵빵하게 부푼 그 가방은, 누가 몰래 들고 가려고 해도 두 걸음 못 가고 엎어질 무게다. 허리에 전해지는 묵직함이, 불안의 무게처럼 느껴져 마음이 아리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묵묵히 식탁을 차리는 일이다. 아이의 내면을 잘 채워줄 음식을 만들어서 식탁 가득 차려내고 싶다. 괜찮다고 토닥이고 싶다. 그러나 요리에 영 소질이 없는 나는 늘 어렵다. 그럴 때면 찾아보는 영화가 있다. 바로 영화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감독, 2018)다.


화면 캡처 2026-02-09 225043.jpg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사계절


주인공 혜원(김태리 배우)은 겨울눈이 소복하게 쌓인 길을 밟으며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그가 집으로 와 먼저 한 일은 겨울 밭 눈 속에 박힌 배추 밑동을 캐내는 일이다. 배추를 씻고, 하얀 밥을 짓고, 된장을 풀어 배춧국을 끓인다. 다른 반찬은 없지만 든든한 한 끼다. 왜 돌아왔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혜원은 “배가 고파서”라고 답한다. 그 말은 진실이다. 물론 시험 탈락과 연애 문제, 취업 실패 같은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끝내 채워지지 않았던 허기, 공허였을 것이다.

돌아온 집에서 혜원은 자신을 위한 요리를 한다. 계절이 내어주는 재료들은 때에 맞는 생명력을 품고 있다. 아직 세상은 춥지만, 이미 사방에 온기가 스며드는 초봄. 혜원은 감자를 심고 봄나물을 캔다. 영화 속 대사에 따르면 봄나물은 ‘공으로 얻는 것’이다. 애써 증명하지 않아도,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 자체로 충만하다. 생명은 애초에 조건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증거 같다.

그렇게 사계절 자연이 내어주는 충만함을 먹으며 혜원은 서서히 회복한다. 물론 ‘잡초가 자라듯 걱정도 자라고’, 어떤 문제들은 끝내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겨울이 되어야 맛있는 곶감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삶의 속성이라는 것을 혜원은 비로소 받아들인다. 그렇게 그는 허기를 견디는 법이 아니라, 허기를 채우는 법을 찾아가고, 끝내 자신만의 레시피를 써 내려갈 힘을 얻는다.

나도 봄의 숨결을 담은 냉이, 두릅을 꺼낸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겨울 같은 시간이 온다. 괜찮은 척 버티다 보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식어버리는 때. 그때 필요한 것은 더 애쓰라는 말이 아니라, 허기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토닥이는 응원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식탁에 앉는다. 알싸한 봄나물에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내민다. 아이에게 내가 주고 싶은 한 끼는 거창하지 않다. 영화에서 말한 것처럼 공으로도 얻는 충만한 봄의 맛이다.

긴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봄은 오지 말라고 해도 온다. 증명하지 않아도 애써 불러오지 않아도 겨울을 통과한 모든 생명에게 조용히 다가온다. 기숙사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는데 혀끝이 알싸하다. 봄나물의 맛이다. 그래도 봄나물의 맛이 희망과 닮아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아이가 뒤돌아본다. 나는 힘껏 손을 흔든다.

이제, 정말 봄이 오고 있다.




추신 :

한 잡지에 매달 <영화와 음식>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2월의 주제 음식이 봄나물이었다. 봄나물 관련된 영화를 찾아보다, 결국은 (아껴두고 싶었던) <리틀 포레스트>를 다시 보고 썼다. 이 글은 이 잡지에 실린 글이다. 글을 써야 하니 자세히 봤고, 김태리가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하고, 음미하는 '초능력'에 반했다. 따라 하고 싶었다. 덕분에 나물 요리를 아주 많이 했다.


900_1770184092569.jpg 글이 실린 잡지 이미지


*원문은 여기

https://www.at.or.kr/upload/image_upload/ebook/202602/ecatalog5.html#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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