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목표는 바보같은 사람 되기
나는 나의 의도를 늘 훌륭한 목적에 두고 있소이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며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그 목적이오. 이러한 일을 이해하고 이러한 일을 행동으로 옮기며 이러한 일을 떠받드는 자가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도 되는지.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안영옥 옮김 『돈키호테 2』 (열린 책들) p405
돈키호테 완역본을 다 읽었다. 1권이 780페이지, 2권이 970페이지다.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난 뭘 해도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면 참 좋겠다만, 그건 아니다. 그저 한 인물의 이야기를 이렇게 장대하게 그려낸 세르반테스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후기를 읽어보니 세르반테스의 삶 자체가 드라마다. 레판토 해전에서 싸우다가 왼팔을 못쓰게 되고, 귀국길에 거의 다 도착했는데 해적에게 붙잡혀 무려 5년을 알제리에서 포로로 지낸다. 동생과 함께 잡혔는데, 몸값을 다 마련하지 못해 동생만 먼저 풀려난다. 세르반테스는 그 사이 몇 번의 탈출 시도를 하지만 다 실패해 생사를 오고 갔다. 귀국해서 돌아온 뒤에도 여러 가지 불운이 겹쳐 옥살이를 했고, 자신의 몸값을 대느라 가난해진 집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애썼지만 늘 가난했다. 정말 이런 이토록 불운한 사람이라니. 내가 아는 선에서 이 불운의 비교 대상이 있다면 2025년에도 여전히, 시즌 22로 방영되고 있는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의 주인공, '그레이' 정도 일 것이다(익사 사건, 총기 사건, 비행기 추락, 남편 사고사, 엄마 치매, 불륜 등등. 정말 온갖 불행이 그레이를 강타하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살아낸다. 그레이 아나토미를 연기한 배우, 엘렌 폼페이야말로, '돈키호테'급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거 같다). 그래도 그는 드라마 속 캐릭터지. 세르반테스는 실존 인물 아닌가. 그럼에도 이런 책을 써냈다. 웃음을 잃지 않고, 지혜와 성찰이 가득한! 벽돌 책을!! 무려 두 권이나. 대단하다.
지난주에 도서관 10주년 행사를 했다. 원래는 행사 같은 건 안 하려고 했다. 근데 참 이상하게도 도서관 일은 늘 '어쩌다 보니' 커진다. 허허허. 아침에 나가 도서관 정리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오후에 공연 팀 진행을 했다. 그렇게 성대하고 풍성하고 흥겨운 행사가 6시쯤 마무리되었다. 나 역시 피곤이 몰려왔다. 얼른 집에 가서 눕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발견하고 말았다.
세상에 떡이 두 박스하고 반 정도나 남아 있었다. 무려 250개다.
그전 행사에는 늘 떡을 200개 정도 주문했다. 떡은 늘 예상보다 빨리 소진됐다. 늦게 도서관을 찾으셨다가 떡이 없는 걸 알고, 민원인처럼 우리에게 욕(?)을 하시는 분도 계셨다(그분이 내신 관리비에 이 떡값이 포함이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주장을...).
아무튼 이번에는 도서관 10주년 행사니, 특별히 더 넉넉하게 400개를 주문했다. 그런데 그날은 생각보다 떡이 천천히 나갔다. 겨울비가 계속 오고 추워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사실 하루 종일 정신이 없어 떡이 그렇게 많이 남은 것도 몰랐다. 정해진 행사가 끝나자 사람들이 지친 얼굴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렇게 모두가 사라진 텅 빈 도서관에서 '떡'하니 남은 '떡' 상자를 발견했다. 그것도 무려 2 상자 반!!
아, 어'떡'한단 말인가. 이 많은 하트를!
그냥 두고 갈 순 없다. 내일이면 굳을 것이다! 하루 지난 떡을 선물(?)로 드릴 수는 없다. 상자를 열어보니 아직 따뜻, 말랑하다. 괜찮다. 맛있다. 부랴부랴 아파트에 방송을 다시 부탁했다. 운영진 방에 상황을 알리고 그동안 애써주신 마을 어르신들이나 도서관 선배 언니들에게 문고리 배달을 하기로 했다. 다행히 방송 덕분에 사람들이 물밀듯이(?) 찾아왔고, 운영진분들 중 몇 분이 나와서 떡 배달도 도와주셨다. 나는 떡을 나눠드리랴, 새로 신규 가입을 도우라 나눠 줄 떡을 분배하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떡은 빠르게 소진되어 갔다.
추적거리는 비를 헤치며 마지막 떡 배달을 끝내고 집에 오니 밤 9시. 털썩 주저앉는데 허리가 이상하다. 욱신 거린다. 찌뿌둥하게 아프다. 그러고 보니 하루 종일 거의 서 있었다. 무거운 앰프와 떡 상자 같은 것도 막 들었다. 먹은 건 김밥 한 줄, 떡 2개, 커피 두 잔 정도. 거울을 보니 얼굴이 누렇다.
그날 밤 매우 피곤한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허리 찜질용 매트 위에서 아픈 허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제야 배도 고팠다. 피곤하고 아프고 배까지 고프니 갑자기 현타가 왔다.
"나는 왜 하루 종일 먹지도, 잘 앉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떡까지 배달하며 종종 거렸나?"
최근에 자녀 대학 진학에 아주 성공하신 마을 주민 중 어떤 분이, 우리 도서관 운영진에게 '바보같이 도서관 활동 같은 거 하고 있냐'라고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무례한 그 말을 그 당시에는 웃기다며 흘려들었었는데, 그 밤 갑자기 내 귀에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나 정말 바본가?'
돈키호테 하면 '풍차에 뛰어든 미친 사나이'가 떠오른다. 그러나 정말 그건 전체 이야기 중 먼지처럼 작은 한 장면일 뿐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된다. 그는 삶을 진심으로 즐겼고, 명석하고, 자유와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걸.
사실 돈키호테보다 한 길 위에 있는 존재가 산초다. 1권 초반을 읽을 때는 왜 바보같이 광인 돈키호테를 따라다니며 온갖 고생을 하느냐고 한심해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보니 그게 산초의 매력이자 본질이다. 산초 역시 욕심과 야망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심을 잃지 않는다. 바라던 섬의 통치자가 된 산초. 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솔로몬에 버금가는 해결책을 제시하며, 훌륭한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그 권력에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삶의 중심으로 돌아오기 위해 과감히 내려올 줄 아는 용기가 있다. 산초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가장 정직하다. 그래서 그는 고민 없이 쉽게 잠들며,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동시에 과감히 판단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산초가 미친 돈키호테를 따라다닌 게 아니라, 산초가 있었기에 돈키호테가 마음껏 미칠 수 있었다. 산초는 돈키호테의 세계와 능력을 그 나름의 지혜와 위트로 든든하게 받쳐준다. 그 덕분에 둘은 '바보같이' 즐겁게, 자유롭게, 스스로의 삶을 마음껏 유랑하며 산다. 즐긴다.
반면 소위 돈키호테를 구하려고 애쓰는 신부나, 놀리기 급급한 공작 부분의 '안 바보 같은' 삶은 어쩐지 더 처량하다. 속 빈 강정 같다. 남을 쉽게 재단해 비아냥거리고, 소위 '정해진 틀'에 맞추려 한다. 그게 현실이라 믿는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지금 서있는 세계는 느끼지도 보지도 못한다. 진짜 '중요한 것'이 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짜 바보는 정말 그들이 아닐까(무례한 이야기를 했던 그 사람도?...)
그래서 2026년 나의 목표는 '바보같이 살자! 우스운 사람이 되자!'다.
너무 좋아하는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서 말했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정말이다. 혹시나 손해 볼까 십 원 한 장까지 따져가며 절대 손해 안 보려는 '안 바보같이 사는 삶'말고,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며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바보 같은 삶을 살고 싶다.
다행히 내 곁에는 하루 종일 행사를 함께 하고, 비 오는 날 굳이 떡을 나눠주는 걸 돕겠다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다시 나온 사람들이 있다.
2026년에도 그런 그들과 함께 좀 우습게, 바보같이 쭉,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