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늘 미래에서 과거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어요."

- 강의 시간을 착각했다(2)

by 은작

우린 늘 미래에서 과거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어요."

https://brunch.co.kr/@fullmoonmind/91

(* 위의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엄마. 왜 재미있게 놀면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지?" 더 놀고 싶은 아이를 놀이터에서 겨우 데리고 나오는데, 4살 아이가 물었다. 그 질문이 너무 귀여워 "그러게. 왜 그럴까."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 시간도 너무 재미있으니까. 나도 한 번 놀아볼까! 하고 같이 신나게 달리나 봐."


그렇다. 4살 아이도 알고, 40살 넘은 나도 안다. 시간이야말로 상대적이다. 쏜살같기도 하고, 영겁 같기도 하다(요가를 할 때 시간의 상대성을 정말 수시로 체험한다. 30초 비틀기를 하는데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진다. 반면 마지막 송장자세로 누워있을 때는 이보다 빨리 흐를 수가 없다. 정말. )


세시 간 짜리 강의를 두 시간으로 착각했다. 이미 준비한 피피티는 끝이 났고, 내 앞에는 우주처럼 넓은 한 시간이 펼쳐져 있다. 사고가 정지됐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십 분간 쉬기로 했다. 수강생들이 평온한 얼굴로 흩어졌다.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눴다. 반면 나는 급똥이 왔으나, 화장실을 못 가는 얼굴로 노트북에 머리를 박았다. 미리 캔버스와 캔바를 열고 지난 강의안들을 보았다.

아, 한 시간을 어떻게 때울 것인가?


십 분은 속절없이 흘렀다. 이제 내게 남겨진 시간은 50분. 평온을 가장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게 어떨까요? 각자 활동하고 있는 공동체가 있으시니!"

그때 맨 앞에 앉아 있던 한 분이 시니컬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시간 아까워요. 그냥 다음 주에 하겠다고 한 걸 미리 좀 해주세요."


심지어 달력에 수기로 이렇게 강의시간까지 써서 딱 책상 위 잘 보이는 곳에 올려뒀는데도 몰랐다!
2회 차 강의 모습. 이날은 3시간 강의안을 꽉 채워서 갔다. 푸하하하.


강의를 아주 많이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햇수로 10년은 넘었다. 평균적으로 두세 달에 한두 번씩은 한다. 그러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번은 넘을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새롭다. 크게 보면 '글쓰기'란 테두리 안에 있지만, 주제에 따라 대상에 따라 내용이나 흐름이 모두 다르다. 나는 강의안을 준비하며 그때그때 흐름을 정리하는 편이다. 책에서 인용한 예시는 그대로 가져가는 경우도 많지만, 그래도 매번 무언가를 새롭게 찾고 추가한다. 대상에 따라, 시기에 따라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 참 길게도 썼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다음 주 강의안은 아직 1도 만들지 않았다는 것! 물론 지난 강의를 참고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일하지 않다. 무엇보다 이렇게 얼기설기해버리면 다음 주에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다음 주도 당연히 3시간인데!


그러나 수강생의 직접적인 요청이 있었으니 무시할 순 없다. 다음 주에 하기로 했던 것 중에서 가장 핵심이 아닌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AI 글쓰기'였다. 11월 중순, 한 대학에서 '자기소개서 & 내 글 쓰기 특강'을 진행했다. 미리 쓴 글을 받아서 첨삭도 했다. 근데 한 학생이 누가 봐도 AI가 쓴 글이 명백한 글을 보냈다. 그 글을 보고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아서 좀 길게 만든 강의안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마을 활동가들이 올린 글에도 그런 글들이 보였다. 맞다. AI를 활용하는 시대다. 쓰지 말란 말이 아니다. 나 역시 쓴다. 그러나 그것을 활용하는 것과 그것이 쓴 글을 그냥 복사해서 올린 건 너무 다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특히 처음 글을 쓸 때는 그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름 열변을 토하고, 시계를 봤다. 30분은 지났나 싶었다. 그러나 웬걸. 딱 13분이 지나있었다. 내게는 아직 37분이 남아있었다. 아,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머릿속이 엉켜왔다.

다음주강의는준비도안됐는데.그전에했던미리해야하나.그럼강의가부실할텐데.아이런초롱초롱한눈들이라니.한다고해도다음주3시간은어쩌나.나는왜이모양인가.기본적인강의시간도모르다니.타로점이불길했어.역시.....


수만 가지 생각이 띄어쓰기도 없이, 덮쳐왔다.

그때 갑자기! 한 분이 손을 드셨다. 그리고 말했다. '질문이 있다'라고!

그렇게 나의 귀인이 나타났다.


*

결과적으로 그 질문 덕에, 남은 강의 시간을 꽉 채웠다(결국 시간을 조금 오버하기까지 했다).

'나의 공동체 활동에서 실제 기록을 어떻게 했는지'가 그분이 던져준 화두였다. 쉬는 시간 조급한 마음에 막 뒤졌던 피피티 중에 하나가 떠올랐다. 일 년 전, 바로 이 강의실에서 같은 주제로 강의를 한번 한 적이 있다. 우리 마을 공동체 기록집을 만든 과정을 보여준 것이었다. 나는 그 피피티를 펼쳤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을 감사하게 채웠다. 정말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절한 질문 덕이다. 원래 의도대로 대충 때우지(?) 않고, 정말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를 구해준 2024년 강의안 표지. 질문을 해주신 귀인님! 정말 감사합니다.


*

지난주에 '한 시간 착각 글'을 올린 뒤, 몇 분을 만났다. 그들 중 내 글을 읽은 이들이 다양한 실수담을 들려줬다. 듣고 보니 강의 시간 착각 정도는 애교였다. 인생의 한 획을 긋는 순간들의 결정적인 실수들을 들으니 정말 인생 운이구나(응?)싶다. 그런데, 또 듣다 보니 다른 성찰이 왔다. 지금 당장은 어이없는 실수에 인생이 마냥 꺾일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좋은 길로 가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했나 보다.


"현재가 과거에 의해, 그리고 미래의 두려움에 의해 압박받고 있는 거예요. 현재는 과거나 미래만큼이나 추상적인 것이에요. 현재의 우리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를 함께 가지고 있는 거예요. 우린 늘 미래에서 과거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어요."

- 보르헤스의 인터뷰 중(신효원 『우리가 사랑한 단어들』 재인용 p70)


보르헤스의 인터뷰를 읽으며, 김연수 작가를 생각했다. 그의 소설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나는 이 메모를 했었다. '우리의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과거'뿐이다. 결국 우리의 해석과 태도가 모든 것이다.'

삶은 늘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뜻대로 되는 게 또 늘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결국 그 변수를 어떻게 해석하고, 관리해 '미래에서 과거로 미끄러지는지'가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할 수도 있다.


지난주 타로는 내게 말했다. '흔들리지 않고 버티는 안정'이 행운 포인트라고. 미래는 늘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 또 정해져 있다. 상수다. 내가 실수를 하든 그렇지 않든 고정이다. 그러니 나약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최대치는 변수에 대응해 '버티는 것'뿐이다. 미래에서 과거로 미끄러지는 동안 만나는 찰나의 현재에서 최대치의 안정을 찾아가기 위해서 '버티기'. 그렇게 나만의 '버티기' 스킬을 배워나가는 게 잘 살아가기 위한 최대 스킬이 아닐까 싶다.


(둘째 아이가 학원을 다녀보고 싶다고 해서, 처음 가봤다. 아이가 테스트를 하는 동안,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주소'란에 보르헤스의 인터뷰를 필사해 본다. 학원이야말로 어쨌든 정해진 '확실한 미래'를 담보로 불확실한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의 두려움을 무기로 압박하는 곳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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