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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다정이 Apr 25. 2020

2. 혼자는 아닐 나의 세계

2018. 8. 3





나의 취향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봤다. 혼자 영화관에 갔는데, 앞, 옆, 뒤로는 아이들이 가득했다. 그렇게 옹기종기 함께 앉아서 봤다. 영화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않았다. 애니메이션을 볼 때면 그림체를 눈여겨보게 되는데, <인사이드 아웃>의 그것은 딱히 내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영화관을 나섰다. 함께 우르르 나오던 아이들은 영화가 어땠는지, 가족과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나는 벌게진 눈을 훔치며 얼른 화장실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겸연쩍)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내 예상과 달리 내 취향을 완전히 저격한 영화였다. 우리 모두 각자의 내부에 그런 휘황찬란하고도 멋진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 그런 걸 구현해버린 영화를 앞에 두고, 그림체가 조금 별로야, 라는 내 마음속 편견 따위... <인사이드 아웃>을 보며 나는 기대 어린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안의 세계에는 어떤 섬이 있을까. 어떤 모양의, 어떤 색깔일까. 구슬은 무슨 색이 가장 많을까. 나의 핵심 기억은 뭘까. 어떤 기억과 구슬과 섬이 지금의 나를 구축하고 있는가.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태어나서부터 쭉 살아온 장소를 떠나게 된 라일리와 그녀 안의 이야기다. 라일리는 상실과 걱정, 기대와 같은 복잡한 감정을 겪게 되는데, 그 순간 그녀의 안에서도 어떤 사건들이 유려한 이미지와 함께 펼쳐진다. 기쁨과 슬픔, 버럭과 까칠, 그리고 소심이까지. 이 다섯 감정을 주축으로 하여,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라일리의 마음 역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섯 감정 중에서도, 특히 기쁨은 라일리에게 엄습해오는 불안이랄지 걱정이랄지 슬픔이랄지 하는 것들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 이사를 온 직후부터 라일리는 자꾸 슬픔과 연루된다. 그런 라일리가 걱정스러운 기쁨은 어떤 선을 넘게 되는데, 그러면서 이야기가 벌어진다. 무너져가는 라일리의 내부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그녀에게 다시 행복을 주기 위해 고투하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버럭·까칠·소심이가 있다.  

   





빙봉


내가 왜 이 영화를 관람하고 나서 화장실로 향했는지는, 아무래도 빙봉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자신의 몸이 바스러질 수 있다는 것, 바스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영원히 사라지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해버리는 인물에 약하다. 그런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과, 그 마음에 수반되는 결심과 용기, 그리고 어느 정도의 낙담. 그 모든 것들이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커다랗게 다가와서 마음이 이상해지는 것이다. 나로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을 기어코 하고야 마는 인물을 영화로 만날 때면 깜짝 놀라고 동경도 하였다가 어쨌든 이제는 없다, 영영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닿아버리면 며칠 동안을 그 인물에 대해 생각한다. 빙봉이 내게 그랬다. 나는 빙봉을 영영 잊지 못할 테니까, "빙봉은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어!"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아지다가도 빙봉에게 있어 그런 건 라일리가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게 아닐까. 또다시 착잡해지는, 무한의 루프에 빠지는 것이다...



빙봉....




아무튼! 다시 영화 전체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영화 <인사이드 아웃> 메시지는 명확하다. 이동진 평론가의 코멘트가  영화를  문장으로 정리해준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정호승의  <슬픔이 기쁨에게> ).


슬픈 일, 눈물을 쏟게 되는 일, 마음이 저려오는 일에 대해 우리 대다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력하다. 그런 게 엄습해오면 일단 그 안에 머물러야 그다음이 가능하다는데, 그걸 알아도 해내기는 힘이 든다. 그 안에 머문다는 것, 그러니까 슬픔이라는 감정에 저를 내맡긴다는 게 언뜻 불쾌한 것도 같고, 왠지 지는 기분도 들고. 그런 것에 섣불리 마음을 내맡겼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지. 슬픔을 알아버린 만큼 내 삶이 앞으로도 영영 슬픔과 가까이 있는 것이면 어쩌나. 그런 생각이 들곤 하니까.


하지만 슬픔은 오직 슬픔으로만 오지 않는다. 슬픔은  예상치 못하게 기쁨과 얽혀 도무지  단어로 설명할  없는 감정으로까지 가닿을 때가 있다. 그렇기에, 앞으로 도래할 많은 감정들을 선연히 맞이해도 괜찮을 거라는 . 슬픈 감정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 영화를 보며 그런 마음을 조금은 얻어갈  있었다. 조금  어른이 되어가는 일이겠구나, 생각하면서. 그런데 여기서  막상, '어른이 되어가는 '이라고 생각하면.




어른이 되어가는 일은 무섭다. 나이로 따지자면 이미 진즉에 어른이지만, 그럼에도 지금 여기서  세계가 확장되는 ,  세계와 포개지는 타인의 세계를 짐작하고, 그것을 선연히 받아들이는 .  사이에 존재하는 숱한 관계도 언젠가는 상실되고야 말고, 나는  숱한 감정을 겪어내야만 하는 . 이런 일들을 내가 감당할  있을까. 생각하다가 결국에는 막막하고 두려우니까, 피해버리자! 그런 결론에 도달해버리고 만다.


그래도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이 문장을 알게 한다. 알록달록한 세계를 만들어 내보임으로써, 그 문장을 사실로 만든다. 그 세계는 내 소중한 기억을 지탱하기 위해, 혹은 기쁨을 주기 위해, 혹은 아주 절망은 아닌 삶을 위해 여기저기를 누비는 ‘나’들이 있는 장소이다.





내 마음과 기억, 그리고 그것에 얽히고설킨 내 삶의 결들을 납작하게는 만들지 않으려는, 결코 아주 없는 것은 되지 않게 하려는 내 안의 힘이 있다. 설령 어느 것은 아주 사라지는 게 되더라도, 그 상실을 슬퍼하며 눈물을 펑펑 쏟는 힘이 내 안에 있다...! 쫄보에다가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이 나를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면, 저 안에서부터 모락모락 힘이 솟아나는 기분이다.


사라질 것들은 사라지고야 말겠지만, 그 사이 더욱 형형색색이 되는 구슬들이 내 안에 유려하게 흐르고 있다고 하니까. 자라나는 일, 더 넓은 장소를 누비는 일, 어른이 되고 더 커다란 사람이 되는 일. 이 모두를 오롯이 감당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기고야 만다. 그럼에도 나는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다소 오그라드는 이 말을 절로 납득시키는 <인사이드 아웃>은 그래서 꼭 봐야 하는 영화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관람한 이후 (당시 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룸메에게 영화가 너무 좋았다는 얘기를 꺼냈는데, 룸메는 영화는 좋았는데 슬픔이 때문에 너무 짜증이 나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을 건네 왔다. 이 말이 나에게 너무나도 충격이었는데,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기쁨이에게 그런 짜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슬퍼야 마땅한 일을 제발 망치지 말아 줘. 그렇게 생각했던 나였기에, ‘슬픔이가 짜증났다'는 룸메의 말은 정말 많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상대적인 것이겠지만, 나는 아마도 기쁨보다는 슬픔에 가까운 사람인가 보다. 그리고 ‘기쁨·슬픔·버럭·까칠·소심’ 중 어느 누구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지는 사람마다 다른 것인가 보다, 하고.


룸메의 말을 들은 이후로 나는 주변 사람들과 영화 <인사이드 아웃> 이야기를 할 때면, 이런 질문을 꼭 하는 사람이 되었다. 너는 영화 보는 내내 기쁨이가 짜증이 났니, 슬픔이가 짜증이 났니?



           




2018. 8. 3

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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