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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izelnut Jul 24. 2020

겨울, 노인네가 채운 하루

등산 양말에 울 백 프로 목도리까지 단단하게 챙긴다. 끝난 줄 알았지만 안방에 가서 손주가 작년에 두고 간 군용 방한 귀마개까지 야무지게 챙긴다. 어떤 한파가 닥쳐와도 끄떡없는 차림새다. 아니 애초에 한파가 몰아치는 날 왜 나가려고 채비를 하는지 자체가 의문이다. 올해 막 80세를 넘긴 할아버지는 따가운 눈초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신발을 동여맨다. 


손녀는 그런 할아버지를 눈으로 좇고 있다. 약간은 흘겨보는 눈빛에 할아버지는 소파 쪽은 보지도 않는다. 배낭에는 물과 오이, 보온병에 든 커피와 빨간 손수건, 태극기가 들어있다. 꽤나 빵빵한 가방이 비좁은 신발장에서 여기저기 부딪힌다. 마치 맞지 않은 자리에 들어앉은 누구처럼 폐를 끼칠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가지 말라니까!” 손녀는 마지막으로 의미 없는 말을 소리쳐본다. 할아버지는 무심하게 지팡이를 들고 손 인사인지 모를 애매한 손짓을 하고 나간다. 손녀 역시 기대도 안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방으로 쏙 들어가버린다.


‘노인네에게 겨울은 지나치게 혹독하군’ 패딩 주머니에서 까만 마스크를 꺼내 주섬주섬 귀에 거는 동안 할아버지는 생각한다. 사실 지팡이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지만 살얼음이 낀 도로가 무서웠다. 지난 겨울에 다친 무릎이 화근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유일한 하루 일과였던 등산을 하다가 크게 다쳐 아직도 간간히 병원에 다녀야 할 정도다.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자식들은 이때다 싶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길래 산은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냐, 다 늙어서 뼈도 잘 안 붙을 텐데 어쩌려고 그랬냐 싫은 소리들을 잔뜩 해댔다. 평소에는 전화도 잘 안하던 것들이 노인네 고집 한 번 꺾겠다고 꽤나 닦달이었다. 


무릎도 아프고 자식들 성화에 못 이겨 그해 봄, 여름은 집에 꼼짝 않고 있어야 했다.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일찍 떠 지는 눈에 하루는 지나치게 길었다. 며느리가 사 놓고 간 냉동 음식을 마누라가 데워주면 그럭저럭 아침을 뜨고 그대로 안방에 들어가 티비를 본다. 하루 종일 티비를 보고 있노라면 화딱지 밖에 안 난다. 정치하는 놈들 중에 마음에 드는 놈이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것을 보고 있자니 화병이 나 연속극하는 데로 돌려버린다. 


그러다가 친구 놈에게 배운 핸드폰은 여간 요긴한 물건이 아니었다. 뉴스도 보고 라디오도 듣고 안방이 더 이상 답답하지 않았다. 친구 놈이 계속 보라고 성화를 하던 동영상들도 이제는 내가 먼저 열심히 챙겨본다. 이제는 더 이상 산에 가겠다며 고집 부리지 않는다. 대신 광화문에 나가 태극기를 흔든다. 아들 힘들게 하는 대통령, 손주들 괴롭히는 정치인들 정신차리게 하려고 매일 같이 나간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친구들도 매일같이 만나니 이제야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하며 유유히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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