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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Nov 30. 2023

<이런 날 그림책>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는 날




  무기력과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동안 내 안에 있던 이야기는 점점 말라갔다.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도 잃어버렸다. 겨우 힘들게 한 문장을 뱉고 나면 앞에 있는 모든 문장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얘기든 쏟아내고 싶었는데 이 얘기를 하면 안 됐고, 이렇게 표현하면 더더욱 안 됐다. 내 머릿속에 있는 무수한 심판관과 검열관이 자꾸만 나를 비난하고 재단했다. 그들이 무서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들이 무서워 성과를 내야 했다. 온전한 나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그들이 원하는 나'가 되고 싶었다. 그 순간, 이야기는 사라졌다.


  그래서였나 보다. 제목만으로도 심장이 아프게 쿵쾅댔던 이유가. 표지의 그림은 푸른색과 회색 계통의 색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쓸쓸하거나 우울하지는 않다. 오히려 중앙에 크게 배치된 인물로 인해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중절모자를 쓴 그의 얼굴은 무척 길고, 단순하다. 입술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는 제목이 있는데 글씨체는 귀엽고 반듯하지 않다. 자음과 연결된 길고 가느다란 선은 이 남자의 콧수염 같기도 하고, 풀려버린 올 같기도 하고, 세상 모든 이들을 연결해 주는 끈 같기도 하다. 유연하고 자유롭게 이어진 선처럼 이 이야기도 그렇게 뻗어 나가겠지, 가늠했다. 이야기를 잃어버린 세상은 분명 삭막하고 절망스럽지만 작가인 구리디는 그만의 유머를 섞어 무심한 듯 희망을 그려낼 것이다. 뒤표지에 있는 꽃문양을 보면서 확신했는데도 아팠다. 그래서 어떻게든 슬픔을 찾아야 했다. 그때 나는 위로를 원하면서 절망을 바랐고, 웃고 싶으면서 한없이 우울하고 싶었다. 괜한 자기 연민과 과한 자기혐오는 무엇이 진심인지 헷갈리게 했고, 감정을 과장하고 왜곡하면서 거짓을 진실로 만들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 표지만 봤다. 그리고 연달아 반복해서 읽었다. 며칠 뒤에 다시 읽고 또 읽었다. 이야기를 잃어버린 채 허우적대던 내게 『이야기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생긴 일』은 읽을 때마다 새로웠다. 이런 내용이었는지 새삼스러웠고, 이런 그림이 있었는지 놀라웠다.




 『이야기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생긴 일』의 이야기는 '옛날 옛날에' 씨가 태어난 날부터 시작한다. 그는 자라면서 단어로 문장을 만든다. 문장은 이야기가 되고, 전설이 되어 마을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든다. 이웃들이 답례로 '옛날 옛날에' 씨에게 새 단어를 선물하면 그는 그들에게 받은 단어들을 넣어 경이로운 세계를 만든다. 복잡하고 길고 이상한 단어, 비슷한 말, 형용사들은 문장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그러던 어느 아침, '옛날 옛날에' 씨가 말하기를 멈춘다. 이야기를 잃어버린 마을은 전과 달라진다. 사람들은 웃음을 잃고 절망과 분노와 혼란에 빠진다. 온 마을은 침묵과 긴장만 있을 뿐이다. 마을 사람들은 '옛날 옛날에' 씨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기로 한다.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연기를 하면 될 거라 기대했는데 실패다. 마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어둡고 부정적인 단어로 가득하다.


  표지부터 면지와 본문까지 모든 그림은 각기 다른 명도와 채도의 푸른색과 회색이 전부다. 거침없이 쓱쓱 그렸을 것 같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엉켜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는 듯하다. 과감하게 배경을 삭제하고, 필요한 요소만 부각한 그림은 온갖 걱정과 불안을 끌어안고 있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비율의 '옛날 옛날씨'의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나오고, 이야기에 빠져 행복해하는 이웃들을 보면 그들의 표정을 따라 하고 싶어 진다. 표지에서 보았던 선은 '옛날 옛날에' 씨의 탄생과 함께 시작한다. 선은 '옛날 옛날에' 씨의 입을 거쳐 사람들에게 전해지는데, 그가 만드는 문장과 상상력이 사람과 세상을 연결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연하게 휘감기면서 움직이던 선은 '옛날 옛날에' 씨가 말을 멈추자 사라진다. '옛날 옛날에' 씨가 입을 닫기 시작했을 때의 장면에는 그의 뒤통수만 있다. 중앙을 크게 차지하고 있어 단절이 더 강하게 와닿는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어깨도 축 늘어진다. 침묵만 있는 마을은 세 장에 거쳐 표현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펼침면 가득 집들만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까이에 가서 사진을 찍듯이 집들이 점점 커진다. 다른 장에 비하면 여백도 적다. 침묵이 길어지는 시간이 얼마나 무겁고 갑갑한지 그림에서 충분히 느껴진다.


  그가 왜 입을 닫았는지 생각한다. 상상력이 고갈되었을 수도 있고,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지쳤을 수도 있다. 새 단어를 선물하면서 이야기를 요구하는 마을 사람들이 미웠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 있는 이웃들을 실망시킬까 봐 두려웠을 수도 있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이 '옛날 옛날에' 씨를 짓눌렀을 수도 있다. 사람들의 기대만큼 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입을 다물자,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옛날 옛날에' 씨를 깨운 건 첼로 선율이다. 아가피토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은 '옛날 옛날에' 씨는 드디어 단어를 내뱉는다. 끝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예전과는 다른 방향과 모양으로 선은 이어진다. 마지막 책장을 몇 번이나 덮으니 책표지의 그림이 이해가 간다. 입술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왜 제목이 있는지, 제목의 자음과 이어지던 선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겠다. "상상력이 우리 안에 살아 있도록 만들어 준 구전 문학가들에게"라는 작가의 문장이 오랫동안 마음 안에 머문다.


  예상대로 구리디는 그만의 유머를 섞어 무심한 듯 다정하게 이야기를 엮었다. 이번 작품 역시 자유롭고, 간결하고, 심오하다. 작가는 이야기를 잃어버린 마을을 통해 이야기가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준다. 이야기는 단어들만 엮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상상력이 더해져야 한다고도 알려준다. 음악, 미술, 문학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얻은 영감은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고 전해져서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삶은 이야기가 있어 경이롭고, 이야기는 삶을 바탕으로 풍성해진다.


  다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지 회의를 품었는데 이젠 이야기를 하고 싶다. 미리 겁부터 먹고 비관하느라 상상력을 죽이고 있었는데 머릿속 심판관에게도 무심해지려 한다. 나의 아가피토 덕분이다. '옛날 옛날에' 씨가 다시 말을 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준 음악가 아가피토처럼 신선한 자극을 주는 친구가 있어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닿고 있어서, 당신의 이야기가 나에게도 이어지고 있어서 아주 오랜만에 살짝 설레는 날이다.



* 『이야기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생긴 일』, 라울 니에토 구리디 지음, 김정하 옮김, 주니어김영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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