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안하고 놀기만 하냐고?
유시민 작가는 <나의 현대사>에서 우리나라의 현대사 발전과정이 매슬로의 <욕구 5단계 설>을 따른다고 보았다. 일단 먹고사니즘의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들은 좀 더 고차원적인 욕구가 해소되기를 요구한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생존과 의식주에 관심이 컸지만, 점차 그런 욕구가 해소됨에 따라 ‘자아실현’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자아실현의 집단적 열망이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렇게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룬 우리 사회는 에지 고차원적 욕구인 ‘인정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를 중심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경제의 이슈를 살펴보면 ‘중국 등 개발도상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던가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아직도 기초적인 욕구인 ‘생리적 욕구’나 ‘안정의 욕구’와 같은 낮은 수준의 욕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셈이다.
앞으로는 취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창의 경제의 성공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4차 산업 혁명으로 지식 경제 단계에서 창의 경제로 옮아가고 있다. 창의 경제 시대에는 이전과 같이 관리에 집중해서는 높은 성과를 올릴 수 없다.
산업화 시절, 조직은 직원이 깊이 생각하기를 원치 않았다. 당시에는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정확하게 일하는 근로자가 최고로 쳤다. 생각하는 것은 상사의 일이었고 ‘시키는 것이나 잘해.’라는 업무 지시가 통용되었다. 직원들은 상사가 시키는 일을 그의 기호에 맞춰 정확하게 수행하는지로 평가받았다. 상사는 빨간펜으로 근로자의 결과물을 첨삭하기 일쑤였다.
이제는 물건과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만드는 역할은 개발도상국으로 넘어갔다. 선진국은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개발도상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서울대 이정동 교수는 <축적의 길>이라는 책에서 개발도상국이 강점을 가지는 실행역량에서 벗어나 설계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제는 설계 역량이라는 지적 자산을 가진 나라만 경제 대국으로 남을 것이다.
창의와 혁신은 놀이와 취미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애덤 그랜트의 책 <오리지널스>를 보면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은 다른 과학자들에 비해 다양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노벨상 수상자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이것을 증명할 방법을 찾았다.
취미와 여가에 대해 언급하면 그렇게 놀 생각만 하면 일은 언제 하느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다. 취미 활동을 단순히 일에 반대되는 휴식의 개념으로만 생각하는 사고의 틀에 갇혀 있는 셈이다. 일을 중요시하고 일하는 시간 외에는 ‘일을 위해 쉬는 시간’이라는 이분법적 틀을 가진 생각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다.
취미는 단순히 쉬는 게 아니다. 일에서 쉽게 시도해보기 어려운 새로운 시도, 숙련에의 도전을 해보는 과정이다. 열정적으로 취미를 즐기는 사람 중에는 일할 때보다 많은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취미에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일을 게을리하지도 않는다. 이상하게도 몰입해서 에너지를 쏟아부을수록 더 양질의 에너지가 샘솟는다. 다시 일터에 돌아왔을 때는 더 도전적이고, 더 열정적이 된다. 우리의 정신 에너지는 배터리처럼 일단 써 버리면 방전되지 않는다. 쓸수록 충만감과 성취감이 커지면서 새로운 에너지가 생성된다.
10여 년 전, 처음 독서토론을 시작하는 시기였다. 한창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나는 아직 아이들이 어리고 아내가 육아로 힘든 시기라는 점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한 여성 참가자가 이렇게 지적했다.
"아니, 아내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힘든 시기인데 남편은 한가롭게 책이나 읽고 이런 모임에 나와도 되는 건가요?"
우선은 책은 한가할 때 읽는 것이라는 관점이 흥미로웠다. 내게 독서는 절대 한가로울 때를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힘들고 지칠수록 책이 필요했다. 몸이 지치면 정신까지 흐트러지기 쉽다.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당장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감정이 가득 찬다. 이럴 때 스스로를 다잡아 나쁜 사고를 막고 긍정적인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육아라는 부부 두 사람 모두에게 고난이 닥치는 시간에 나는 책을 읽고, 아내는 드라마를 보며 잠시 환기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시간이 육아기를 버티게 해준 힘이라 생각한다.
취미에 대한 오해의 한 가지는 시간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언제까지고 취미를 즐길 수 없다. 일단 ‘여유의 기준’이 어느 정도인가? 꽤 오래 전에는 부자의 기준이 10억이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10억 정도로 충분한 자산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다. 순자산이 10억 정도가 되면 취미를 즐길 수 있을까? 여유라는 기준에서 보면 10억을 달성해도 여유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늘 ‘지금’이었다. 나도 항상 여건이 갖춰지면, 내 역량이 갖춰지면... 이라는 생각으로 미루기를 반복해왔다. F 상무는 완성도 보다는 우선 시작하기를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골프란 어느 정도 직책에 오르고, 여유가 생겨야 시작이 가능한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보니 돈이나 시간은 큰 문제가 아니었어. 그냥 ‘시작’이라는 행동 자체가 가장 큰 벽이었더라고. 그냥 이걸 어제 했어도 됐고, 3년 전에 했어도 됐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골프를 이렇게 재밌어 하고, 건강도 좋아질 줄 알았으면 그냥 오래 전에 시작할 걸 그랬어. 그냥 시작만이 문제였는데 말이야."
언젠가 여건이 되면, 이라고 말하는 무수한 사람을 만났다. 일에서건, 취미에서건, 그 어떤 영역에서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큰 성취를 이룬 것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서 적당한 때라는 건 절대 오지 않기 때문이다.
경영학은 비효율을 최대한 빨리 제거해야 할 악으로 본다. 경영에 비효율이 있다는 말은 신체에 염증이 있다는 말과 같은 무게를 갖는다. 염증은 더 큰 병으로 진행되기 전에 빨리 제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조직의 비효율은 빨리 없애버려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결국 조직은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래서 끊임없이 효율성을 추구한다.
회사에 다니면 이 효율 추구가 몸에 밴다. 매사에 효율을 외치게 되는데 이런 습관이 나머지 삶을 망친다. 인간관계는 비효율적인 활동을 통해 서로의 신뢰를 쌓는 과정이다. 누구든 상대가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고, 아낌없이 베풀어주길 바란다. 이건 효율성의 측면에서 보면 아무런 대가 없이 아까운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효율을 따지면 신뢰가 무너진다.
예술을 즐기는 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술관에 간다고 꼭 감동을 얻지는 못한다. 반드시 티켓 값보다 큰 효용을 느끼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의 즐거움은 이런 비효율에서 비롯된다. 아무런 성과를 바라지 않고 투자하는 이 몇 시간이 나의 마음을 더욱 풍족하게 만든다.
경제적 효용만으로 활동을 판단한다면 우리 삶은 너무나 팍팍해진다.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 산을 오르고, 더 멋진 곡을 연주하기 위해 악기 연습을 계속한다. 차분한 심성을 위해 명상을 한다. 이러한 시도에 결과는 의미가 없다. 이들에게는 깊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자신만의 우주가 있다. 그 우주에 들어가려는 것 뿐이지 시장에서 얘기하는 ‘가치 있는’ 무엇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시장경제 측면에서 쓸데없어 보이는 일들이 삶에 기쁨을 준다. ‘덕질’이라는 말에는 시간과 비용을 낭비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이 말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덕질이란 용어를 참 좋아한다. 기꺼이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뜻으로 읽기 때문이다.
취미의 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 책을 읽는다고 하면 그걸 해서 뭘 할 거냐고 묻는다. 자격증을 따거나, 외국어를 익히거나, 특정 분야의 지식을 얻는 등 특정한 목적이 있어야 읽기의 효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읽는 게 재밌어서’라고 답하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들은 돈도 벌지 못하는 걸 왜 하느냐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도대체 그걸 왜 그렇게 열심히 해? 돈도 안 되는데."
이들은 어느새 시장경제의 사고방식에 젖어있다. 그래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모른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다. 돈이 되는 일들은 즐겁지 않다.
현재 기업의 인사 업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으로 <경력 관리>를 꼽을 수 있다. 경력 관리 전문가들이 MZ 세대에게 권하는 경력 모델은 <프로티언 커리어>이다. 보스턴 대학의 더글러스 홀 교수는 그리스의 신 프로테우스의 이름을 사용해서 이런 용어를 만들었다. 프로테우스는 마음먹은 대로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앞으로 MZ 세대는 정해진 경력 경로가 없다. 부지런히 탐색하여 그때그때 자신에게 최적인 경력이 무엇인지 결정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정해진 길이 없이 수시로 경력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만큼 경력 관리의 불확실성이 높았을 때가 없었다.
MZ 세대는 한 직장, 같은 산업에 오래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경력 기회를 찾아 이직을 자주 시도한다. 새로운 조직에서의 관계와 새로운 프로젝트 경험을 바탕으로 역량을 갈고 닦는 길을 선호한다. 이 세대에게 일터란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훈련소와 비슷한 느낌이다. 이제는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금방 새로운 지식이 쌓이고 과거에 통했던 지식이 어느새 통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제는 배우는 스킬이 가장 중요하다. 취미는 배우는 스킬을 습득하도록 도와준다. 취미라는 것 자체가 새로운 분야를 즐기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초보로서 배워야 하는 과정이 아니던가.
새로운 경력을 찾아 소속을 옮기고 배우는 방법을 배우면서 미래의 불확실성에 적응해 나가야 한다. 불과 10년만 지나도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래도 한 가지 성공할 확률을 높일 방법이 있기는 하다. 계속해서 체계적으로 발전하는 방법이다. 일이 잘 풀리게 할 여러 가지 기술을 개발해 놓으면 된다. 매일매일 발전하면 10년 뒤에는 완전히 다른 레벨의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한 가지 기술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두 가지 다른 기술에 숙달하는 편이 낫다. 평범한 기술이 몇 가지가 합쳐지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나는 최고로 일을 잘하는 직장인은 아니다. 글솜씨가 탁월하거나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다. 취미 분야에서도 롱보드로 인플루언서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며 한 편으로 롱보드로 취미를 즐기고, 그걸 글로 쓰는 작가로 활동할 수 있다. 교육학 석사 학위를 가졌으니 일이나 취미에서 배우는 스킬에 대해서 언급할 수도 있다. 각 분야에서 나는 최고가 아니지만, 이 모든 분야를 합치면 유일한 스킬을 가진 사람이 된다. 롱보드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
평범한 스킬의 조합은 스킬 각각의 가치를 모두 더한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가진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유명한 작가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쓰는 글이 꽤 유니크 하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