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는 읽힐 적절한 시기가 있다. 그 시기는 나도 모르는 순간에 찾아온다. 나에겐 『뉴턴의 아틀리에』가 그랬다. 과학자와 예술가가 각자의 시선으로 각종 원리와 물체에 관해 쓴 책인데, 이 구성에 흥미를 느껴 구매했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갈증이 난 사람처럼 허겁지겁 책을 펼쳤다. 너무 놀랐다. 첫 번째 챕터부터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드는 배신감을 꾹 참고 열 장 정도 읽었다. 그 열 장을 읽는 일이 그저 기계처럼 머릿속에 활자만 입력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어려운 책을 잘못 샀네. 깨끗하게 보관해서 친구를 주던가 알라딘 중고 서점에 팔던가 해야지. 한숨을 쉬며 책장 어딘가에 꽂아 두었다.
몇 달이 흘렀다. 읽고 있던 책을 완독 한 후 다음 읽을 책을 찾고 있던 나는 문득 『뉴턴의 아틀리에』가 생각났다. 과거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배신감마저 들었던 기억이 있었지만, 책을 집어 들고 첫 장을 펼쳐 조심스레 읽어나갔다. 한 단어 한 단어 천천히 꼭꼭 씹어 읽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글이 술술 읽혔다. 내용도 머릿속에 쏙쏙 들어와 순식간에 두 시간이 지나있었다. 자야 할 시간이 되어 아쉬운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덮인 책의 표지를 보며 '와 씨 이게 뭐지.' 속으로 감탄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책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 인연인 책, 인연이 아닌 책. 술술 읽히는 책은 나의 인연이구나! 생각하며 소중하게 여겼고, 손이 가지 않거나 술술 읽히지 않으면 인연이 아니다 생각해 오래 묵혀두며 외면했다. 하지만 그건 인연이 아니었던 게 아니라, 인연으로 맺어질 적절한 타이밍이 아직 오지 않았던 거였다.
이건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대학교 같은 과 동기인 김도현이 있었다. 김도현과 나는 1학년 때 같은 수업도 들었고 심지어 같이 학생회도 했는데 친하지 않았다. 둘이서 말도 몇 마디 나누지 않았고 각자 친했던 친구들도 달라, 오가며 마주치면 인사만 했던 사이였다. 김도현과 같이 다니던 친구들은 내게 반갑게 인사하고 웃으며 수다도 떨었는데 김도현은 그닥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덤덤했다. 김도현은 내게 중요하지 않은 존재, 같은 과 동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김도현과 나는 점점 마주치지 않게 됐고 이내 나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나는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2년 한 뒤 복학했다. 주전공인 콘텐츠디자인학과 졸업전시와 복수전공인 시각디자인학과 졸업전시를 하기 위해 2년 더 학교에 다녀야 했다. 콘디 졸전을 먼저 하고, 그다음 해에 시디 졸전을 할 생각이었다. 그럼 대학교 입학한 지 7년 차에 시각디자인학과 졸업전시를 하는 건데, 나와 같은 시기에 시디 졸전을 하는 '아는 동기'는 이 땅에 없을 줄 알았다.
아니 근데, 딱 한 명 있었다. 나처럼 7년 차에 복수전공인 시디 졸전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제법 놀라웠는데, 그 한 명이 김도현이라는 거에 곱절로 놀랐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우리는 미미한 동질감이 생겼고 그때부터 개인톡을 주고받았다. 다양한 대화를 하다가 내가 먼저 보고 싶다고 말했다. 15, 16학번 시디 졸전생들 사이에서 우리 둘이 유일한 타과생 13학번 화석이라 그랬나, 관심 없었던 김도현 얼굴이 그냥 보고 싶었다.
나 : 보고 싶네
김도현 : 그래 한번 보자
나 : 맞아 우리 친구였던 적 없지
김도현 : 미친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이전까지는 그냥 동기였지 친구는 아니었잖아?
그렇게 18년 여름에 김도현과 단둘이서 보는 첫 번째 만남을 가졌고,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시디 졸전 준비를 위해서였다. 왜 하필 크리스마스에 만났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우리는 그날 같이 팀으로 졸업작품을 하자고 약속했다. 그 이후부터 19년 7월 졸업전시까지 김도현과 떨어진 적이 없었다. 우리는 콤비처럼 붙어 다녔다. 매일 같이 밤을 새우고, 종종 김도현 집에 가서 잠도 잤다. 시간이 지나 속에 있는 깊은 이야기까지 공유하는 사이가 되며 우리는 더 더 더 가까워졌다.
지금 제일 친한 친구를 생각해보면, 몇 명 안 되는 사람들 속에 김도현이 있다. 나와 접점이 없고 관심도 없어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김도현은 시간을 돌고 돌아 지금 내게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소중한 인연이 되면 이전까지는 분명 없다고 생각했던 접점과 공통점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희한한 일이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다.
책도, 사람도 인연이 아니라 생각했던 것이 언젠가는 특별한 인연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 깨달음은 "친하지 않은 그럭저럭 아는 사람 한 명 한 명을 소중히 생각하자!"라는 흔해 빠진 생각을 준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한 생각'도 준다.
인연으로 돌아오는 것들을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마음 한편을 빈 공간으로 넉넉하게 만들어 놓아야겠다는 그런 생각.